1화. 결국엔 인생 이야기

 

 

 

    추운 새벽 2시 반쯤, 친구에게 메일을 쓰다가 문득 기억의 시작과 끝에 대한 생각을 했다. 고받는 대화가 오랜만에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 그러나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는 이와의 첫 만, 20군데 넘게 지원을 했으나 면접에서 계속 떨어져 온갖 스트레스에 허덕이다 취직한 회사에 처음 출근한 날의 긴장감, 매일 가는 슈퍼마켓에서 진열된 걸 구경만 했을 뿐 머릿속으로 맛을 상상만 하다 처음으로 구입해서 먹어본 감자과자를 입에 넣었을 때의 맛, 아마 이걸 기억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싶, 내가 태어났을 때의 기억. 기억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된 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정말 선명해서 그날의 날씨와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의 얼굴과 복장까지도 기억이 나다가도 그 외의 다른 기억, 취업 활동을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 같은 기억의 처음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며칠 닦지 못한 안경을 집어 들고 애써 보이지 않는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볼 때의 답답함처럼. 그중에는 기억을 하기 싫어서 나 스스로가 지워버린 기억도 있을 것이고 이유 없이 정말 생각이 나지 않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억들 중에는 끝만 남은 기억이 있다.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인연을 끊게 되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고, 왜 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버릴 때는 얼마가 들었는지 그날의 풍경은 어땠는지 또렷하게 생각이 나는 마지막의 기억이 있다. 시작은 잊어버리고 끝은 잊히지 않은 채 몇 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끝이 있다. 정확하게는 기분이 남아있다. 마지막 연락을 했을 때의 나의 기분. 그 물건을 버린 후의 나의 기분. 기분의 기억이 남아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것 같다.

    왜일까. 시작은 잊기 쉬운데 왜 끝은 잊히지가 않는 것일까? 왜 시작은 잊기 쉽고 끝은 기억하기 쉬운 걸까? 마지막 순간이 가장 최근의 기억이라서인 건 아닌 것 같다. 이유가 그것만인 건 아닌 것 같. 족했던 나를 포장하고 싶은 마음일수도 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다짐일수도 있다. 혹은 어떻게든 날 지켜내기 위한 자기방어일수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떠오른 생각이 의문이 되었고 사고가 되어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타인의 시작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사람이 처음 입사한 날의 표정과 긴장감. 주변 사람들이 건넨 말과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 퇴근하던 뒷모습과 당사자가 사라진 공간의 분위기. 창밖으로 보이던 어둑한 풍경. 너무 생생했다. 어제 일어난 일 같았다. 나를 투영했던 것일. 그 사람에게서 나를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랬었지 나 때도 이런 분위기였지. 많이 긴장했었, 싫었, 힘들었, 했던 기억은 잘 떠오르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싫어졌다. 나의 일만 떠올리면 되는데 남의 시작을 이렇게 곱씹고 있는 내 자신이 싫었다. 나를 마주할 용기가 없구, 나는 겁쟁이구나 싶었다. 남을 보고 나를 보는 게 자연스러운 사고일지도 모르지만 자기객관화를 꺼려하는 나의 성격이 이런 습관을 만들었다 싶었다.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게 된 이와의 마지막도 떠올려보았다. 그렇게 끝나버린 관계였지만 사실 미안함은 없다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이었다. 이기적인 걸까.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진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탓에 제대로 전하지 못한 진심이 많아서, 그 사이에 자잘한 모래들이 스며들어 껄끄러워진 관계였다. 뒤이어 떠오른 솔직한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언젠가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변명이 아닌 자초지종을 말해주고 싶은데 기대와 현실은 다르겠지. 그렇게 체념을 하는 게 나를 위해서 좋겠다며 생각을 멈췄다.

    잠들기 전에 떠오른 생각은 계절의 끝이었다. 가을이 가려고 함과 동시에 겨울이 올 때의 경계선이 풍경이나 온도로 형태를 나타낼 때, 혹은 완전한 봄이 되었을 때와 같은 계절의 끝과 시작. 그 순간을 알아채는 것이 너무 좋다.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눈에 보이는 나무와 꽃과 같은 자연을 통해 가장 쉽게 느끼곤 했는, 올겨울이 오기 전 가을의 끝, 춥고 덥고의 반복이었다. 두꺼운 옷을 꺼내는 시점을 맞추느라 매일 아침 꽤 많은 시간을 소비했던 것 같다. 계절이 다가오고 멀어지는 때를 느꼈다는 말을 쓰고 싶었는, 살아내는 것에 집중하느라 바뀌는 자연의 색감도 공기의 냄새도 기억하지 못한 1년이 되어버렸다. 봄이 시작되기 전 2020년과 2021년 사이에 있는 겨울의 끝 어떻게 기억될지는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

    시작과 끝에 대하여, 시작의 모호함과 끝의 선명함에 대하여 반의반은 알 것 같다가도 다시 모르겠다. 무의식이 분리수거를 한 거라고 그렇게 또 도망치려 한다. 나의 의지는 아니었다, 사실 잘 모르겠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끝내지는 않으려 한다. 도망치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우리 모두 다 마주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도 안다.

 

    사는 게 굴렁쇠를 굴리는 것 같다. 끝까지 잘 굴리려면 힘을 조절해야 하고 테를 따라 굴렁대를 손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마지막까지 집중해야 한다. 눈을 떼서는 안 되고 계속 지켜봐야 한. 리는 것, 도중에 포기하는 것도 온전히 나의 선택에 달려있기에 그것은 재미있다. 선택권을 쥐고 있다는 자유로움에 마음이 가볍, 하지만 귀찮아지거나 내팽개치고 도망가고 싶은 때가 오기도 한다. 굴리기 시작하면 어디가 시작점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지만 멈추는 순간은 명확히 알 수 있다. 굴려야 인생이 굴러간다. 시작과 끝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인생이 굴러간다. 시작과 끝을 동그랗게, 그 둘을 이어야만 인생이 지속된다. 그런데 난 아직 너무 부족하다. 멈췄다가 길을 벗어났다가 다시 굴렁대를 잡기도 한, 지나온 길이 왠지 삐뚤빼뚤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 않을 것이다. 도망은 쳐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올해의 첫 연재를 시작하고 싶다. 그렇게 살아내고 싶다. 같이 살아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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