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밤은 오래도록 밝을 거야

이 밤은 오래도록 밝을 거야

 

이 밤은 오래도록 밝을 거야, 길어지는 나날들,

경쾌한 하루의 소음은 흩어지고 사라지고,

밤이 보이지 않아서 놀란 나무들은,

하얀 밤에 깨어 있는 채로 머무르고 몽상한다…

 

무거운 황금빛 공기 중에서 밤나무들은,

그들만의 향수를 뿜어내고 펴 바르는 듯해.

사람들은 향기의 휴식을 방해할까 두려워서

감히 나아가려 하지도 부드러운 바람을 휘저으려고도 하지 않아.

 

도시에서 시작된 먼 바퀴 소리…

약한 산들바람이 일으킨 흙먼지는,

감싸고 있던 지치고 흔들리는 나무를 떠나며,

잔잔한 길거리로 서서히 다시금 내려앉는다.

 

우리는 그토록 꾸밈없고 자주 찾던 그 길을,

날마다 마음에 그리는 습관이 있어

그럼에도 생에서 어떤 것들은 변하고,

우린 다시는 이 밤의 영혼일 수 없을 거야…

 

원문링크
https://www.poesie-francaise.fr/anna-de-noailles/poeme-il-fera-longtemps-clair-ce-soir.php

 

다은

    유독 밤이 오지 않는 계절이 있었다.

    한량처럼 살아도 저 나름의 루틴이란 게 있었는데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는 하늘에 의외로 일상이 엉켰다. 하루의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도 저물 기색이 없는 해에 아까 먹은 건 점심인 듯 다시 저녁을 차려 먹어야 할 것만 같았고, 조도를 낮추며 하루를 정리하는데도 낮잠에 드는 듯 묘하게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어 시계를 보고 전과 같지 않은 하얀 저녁의 빛을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멀거니 보았다.

    어느 떠들썩했던 날의 저녁에도 하늘이 하얗게 빛을 냈다. 10시라고 해도 무방할 22시, 그 정도로 밝았다.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무심한 자신을 옮겨놓기만 하던 시곗바늘은 무시한 채 벗어내려던 하루를  자연의 빛이 가리키는 대로 다시 뒤집어쓴다. 많이 움직여서인지 잠기운 때문인지 모호했고 말갛게 걷고 있지만 밤인 어느 날.

    그때는 돌아갈 집이 없어진 기분이었다. 함께 사는 이가 불편해졌고 마주치기가 껄끄러워 집 밖을 돌았다. 결국엔 그곳에서 나와 새로운 집을 찾았고 흔들리던 마음도 공기 중을 떠돌다가 단단한 땅에 닿았다. 작은 침대에 몸을 깊게 묻고 잠이 들기 전 창 너머 하늘을 보았다. 까맣게 파란 저녁을 가로지르는 주황 빛무리가 이 방의 취침등처럼 밤으로 은은하게 이끌었다. 이제 밤이구나. 오늘은 참 길었어. 잘 자.

 

민주

    3월이 되었다. 오늘 자 일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늘부터 일기를 써도 늦지 않았어.’ 나는 매일 밤 일력을 뜯어서 다이어리에 붙이고 몇 줄의 코멘트를 덧붙이곤 하는데,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던 날에는 몇 장을 쓰기도 한다. 1월 1일부터 야심차게 시작한 일력 일기는 바쁜 2월을 거치며 점점 짧아져서 최근 3일 동안은 노코멘트 상태에 이르렀다. 인터넷에 ‘한국인은 설날부터 일 년이 시작된다’라는 말이 돌았고 그 말이 다시 ‘한국인은 3월부터다’로 들려왔을 때 뜯은 이 일력 한 장이 주는 재미와 응원이란. 나는 성실함을 소급 적용하지 않고 오늘의 페이지에 가득 펼치기로 했다.

    오늘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밤은 오래도록 밝을 거야, 길어지는 나날들…’ 해가 드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는 이 계절을 어떻게 보내고 또 어떤 글자로 옮길 수 있을까. 창가에 앉아서 2월 말에 찍은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걷기 좋은 날씨가 계속되어 한바탕 산책을 했고 셔터도 마음껏 누른 날들이었다. 별생각 없이 찍은 사진들도 단 며칠 지났을 뿐인데 당시 나누었던 대화나 혼자 걸을 때 들었던 거리의 소음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듯했다. 한 주가 더 지나면 덜 생생해지더라도 심심해지지는 않겠지. 누군가는 기억의 생생함이 사라지는 게 퇴색이라고 말하겠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 위에 기억이 또 쌓여서 도톰한 추억이 될 수도 있다. 생각의 궤적을 쫓아가는 건 언제라도 즐겁다. 몇 달 전에 쓴 글이 부끄럽게 느껴져도 더 오래전인 사춘기 시절 쓴 일기는 귀엽거나 측은하기도 하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찍지 않은 날은 사진 일기장에서 깜깜한 날로 남을 것이다. 과감히 불을 끄고 생각에 잠기는 날도 필요하지만 그런 밤이 지속된다면, 혹은 미래에 나에게 보여줄 오늘의 표정들이 남지 않는다면… 미래에서 보내올 위로를 놓치는 게 될까 걱정돼 자꾸만 부지런한 일기꾼이 되고 싶어진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우 다시는 이 밤의 영혼일 수 없을 거야…’ 맞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의 분위기에서 또다시 헤엄칠 수는 없지만, 하루를 열심히 유영한 흔적을 기록에서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3월에는 추위를 걷어가는 소식이 많이 찾아올까. 3월 일정을 정리하다가 문득, 3월 8일 일력의 한 문장이 궁금해졌다. 1년에 한 번 있는 여성의 날이 있는 달이라는 것만으로 눈가가 밝아지는 기분이 든다. 우리의 기록들이 둥둥 떠다니는 이 밤은 오래도록 밝을 거야.

 


 

작가소개

1913년, 화가 데부탕 Desboutin 그림

 

안나 드 노아이유 Anna de Noailles (1876~1933)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1901년 출간한 첫 시집 『헤아릴 수 없는 마음 Le cœur innombrable』 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시집 『사랑의 시들 Poèmes de l'amour』(1924)을 비롯 소설과 자서전을 남겼다.

공쿠르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상이 불발되자

여성 심사위원들로 구성된 페미나 문학상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프랑스어 문학을 드높인 공로로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수상하고

프랑스 내 최고의 명예로 꼽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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