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_존재감
- 나의 낡은 것들: 정수
- 2021. 3. 10. 23:16
잊히는 것과 버려지는 것은 같은 동그라미 안에 있다. 단지 낡았다고 해서 버려지거나 잊히는 게 아니다. 낡았다는 건 소중하고 특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기필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워낙 조용한 아이라서인지 나는 투명한 셀로판지 같았다. 어떤 목록에서 내 이름이 빠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렇게 내 이름이 빠졌다는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교에서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아챌 때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학교에서 편을 먹거나 조를 짜야 하는 상황도 곤욕스러웠다. 나는 어디서나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어릴 때부터 꽤 오랫동안 매일 두 번의 기도를 했었는데 하나는 ‘무서운 꿈을 안 꾸게 해주세요’였고 또 하나는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게 해주세요’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성적인 게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주 잊히는 존재였던 내가, 어쨌든 존재하기 위해 처음 선택한 역할은 착한 사람이었다. 말이 없으면 다들 착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착한 게 아니고 화를 못 내고 거절도 못하고 말도 못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나를 착하다고 했다. 초등학생 때는 크리스마스마다 반 전체가 의무적으로 서로 카드를 돌렸는데, 조악하고 어설프게 만들어진 카드에 지극히 형식적인 내용이 적힌 것들 중 ‘화 좀 내고 살아라!’라고 적힌 카드를 두 번 받아 본 기억이 있다. 말도 섞어보지 못했던 그 친구들에게 너무 착하기만 해 보였던 내가 눈에 들어왔던 걸까.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동생과 싸우고 가출하겠다고 소리치고 집을 나온 적이 있다. 집 바로 옆 주차장 뒤쪽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몇 시간이 지나고 해가 져도 아무도 나를 찾으러 나오지 않았다. 쭈뼛쭈뼛 집으로 돌아갔지만 내가 집에 없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내가 얼마나 존재감이 없는지를 그때 새삼 실감했다. 그건 내가 정말로 너무 조용해서였을까.
사람들은 내가 자주 했던 말이나 행동은 기억하더라도 그게 나였다는 건 몰랐다. 존재감이 없는 건 외롭다기보다 공포에 가까운 감정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 공포 때문에 나는 더욱더 움츠러들고, 잊혀졌다.
환하게 빛날수록 주변이 가려지듯, 어디서나 주목받는 빛나는 동생이 옆에 있어서 내가 더 잊히곤 했던 것 같다. 엄마에게 가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 매번 처음 듣는 이야기가 나오는 동생과 달리 내 에피소드는 항상 들어온 두어 개의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나조차도 가끔 내 기억이라고 생각했던 추억이 알고 보니 동생 이야기였던 적도 있다.
물론 나도 주인공이 될 때가 있었다. 할머니가 엄마를 괴롭힐 때 주로 내가 등장했다. 할머니가 생각하는 내 문제점들은 모두 엄마 때문인 거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나 때문에 집안은 매일 시끄러웠고 그래서 항상 죄책감에 시달렸다. 싸움이 날 때마다 엄마가 이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마가 나는 버리고 동생만 데리고 떠날 것 같아 두려웠다. 할머니가 많이 미웠지만 유일하게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할머니를 거역하지도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난 게 없어서 부모님과 할머니에게 모두 버림받을 것 같아 언제나 불안했다. 사실 이미 여러 번 버림받았던 것 같다.
그런 불안감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물건에 집착을 많이 했다. 무언가가 온전히 나의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안정감을 줬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내가 여섯 살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여관을 했는데 그래서 집 안에는 주인을 잃은 버려진 물건이 많았고 나는 그것들을 구경하고 모으는 걸 좋아했다. 3주가 지나도 주인이 찾아가지 않으면 내 것이 되었다.
달방 언니가 월세를 안 내고 도망가며 남긴 옷과 화장품, 당시 유행하던 여성 혐오로 범벅된 소설책, 숙박료 대신 맡겨둔 손목시계, 침대 사이에서 발견하고 가족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던 권총 모양 라이터, 길거리 리어카에서 파는 각종 노래 테이프, 안경, 삐삐 등등 각양각색의 물건만큼 사연도 다양했다. 그것들이 내 것이 되면 내가 조금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고 허전함이 채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새 물건을 사는 것도 좋았지만, 잊히고 버려지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나의 그 행위를 사랑했다.
그때 나의 소원은 외국 영화 속에 나오는 잡다한 물건을 간직하는 커다란 트렁크를 갖는 것이었는데 아쉽게도 그 소원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물건들을 모으는 만큼 내 방은 늘 엉망이었고 그래서 엄마가 버리면 다시 주워왔다. 똥고집을 부려서 그 물건들을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잘 지켜냈다.
나는 내성적인 내가 참 싫었다. 나를 내성적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은지도 잘 모르겠지만 다들 내가 이상하다고 하고 고쳐야 한다고만 했다. 그리고 난 항상 고치려고 노력해왔다. 개성이나 특별함으로 포장하면서도 고치고 싶었다.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건 어디서도 칭찬받지 못한다. 그래도 내가 조용하기 때문에 받은 유일한 칭찬이 있다.
“네가 가장 여성스러워.”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다 말도 잘하고 당당한데, 그들과 달리 말도 못하고 의기소침한 내가 여성스럽다니. 여성들이 가진 일반적인 모습을 여성스럽다고 해야 할 텐데, 말대꾸 한 번 못하고 조용하다는 이유로 내가 가장 여성스러운 여자가 돼 있다니.
나는 이제 기도를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 노력한 만큼 변해왔지만 여전히 존재감에 대한 공포가 남아 있다. 그 때문에 아직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고 쓸모없는 사람 같아 괴로울 때도 많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용기 내왔는지를. 그렇기에 나는 조금 부족한 사람이기는 해도 부끄러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내 부족함은 나의 특별함이기도 하다.
이제 나도 죄책감 없이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낡을 대로 낡은 내 불안은 이제 버리고 소중하게 낡아온 내 특별함을 더 빛나게 하고 싶다.
◈ 번외편
내가 어릴 때는 동네에 헌책방이 많았는데 혼자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만화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이사 간 집 근처 헌책방 주인아저씨가 공짜로 만화책을 주기도 하며 나에게 잘해줬다. 그 아저씨는 언제나 인기를 독차지하는 동생보다 나를 더 좋아해서 그게 좋았다. 나를 자주 무릎에 앉히곤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만화책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아저씨가 나를 안아 올리더니 밀착해서 더듬는 걸 느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냥 조용히 헌책방을 나와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날 일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반면 비슷한 시기, 그러니까 동생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동물병원에 자주 놀러 다녔다. 귀여운 동물이 있으니 많은 아이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었는데 동생 친구가 진료대 위에서 눕혀져 의사에게 추행을 당한 것이다. 그 친구는 부모님에게는 말 못하고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동생은 곧장 친구들과 경찰서에 가서 그 의사를 신고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동생이 너무 멋있어서. 그리고 내가 부끄러워서. 동생과 난 왜 그렇게 달랐을까. 외모가 달라서? 성격이 달라서일까?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해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이 용감한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는 결말로, 의사는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계속 병원을 운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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