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게발선인장은 다신 안 키워
- 인외식구-사람은 아니지만 함께 숨쉬는: 파이퍼
- 2021. 3. 16. 16:41
나는 글을 쓰면 되겠다. 초등학생일 때에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5학년 담임선생님이 원흉이었다. 어느 말하고 듣고 쓰는 수업 시간에 지목을 당했고, 모두의 앞에서 죽은 할아버지에 대해 쓴 글을 발표를 했다. 가만 듣던 선생님은 너는 글을 쓰면 되겠구나, 하셨다. 그러고는 글을 짓는 행사에 종종 나를 보내서 대회에 참가하게 해주셨다. 상은 기껏 한두 번 밖에 받지 못했는데도, 꼭 나를 부르셨다. 넌 글을 쓰면 돼. 계속 그렇게 덧붙이면서 말이다. 좋은 종류의 세뇌였다. 그 말에 빠져들었다.
글을 쓰면 되겠다고 마음먹은 다음엔, 어떤 글을 써나갈지 다짐할 차례였다. 당시에는 막연하게 슬픈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 써본 글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게 영향이 컸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는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그동안 많은 주제가 날 관통했다. 슬픈 이야기, 사회가 소홀히 여겨 살아내기가 쉽지 않은 것들은 여전히 나를 사유하게 만들고, 글을 쓰게 한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아닌 존재들은 유독 특별했다. 먹히기 위해 살해당하는 소와 돼지, 당연한 자원으로 여겨지는 숲, 나무. 동물권과 환경주의에 예민해진 이후로,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글은 잘 쓸 수 없게 되었다. 글로써 동식물을 애도하거나, 사랑하려고 했다.
어느 순간 내가 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당연히 비건, 당연히 환경주의자였다. 막상 나 자신은 액티비스트 스타일이 아니었다. 동물을 먹지 않지만, 동물권 행진에는 참여해본 적 없었고, 쓰레기를 줄이려고 발버둥은 치지만, 관련된 세미나나 자료를 보는 건 어려워했다. 소비 습관을 바꾸는 것 정도가 그나마 손쉬웠다. 원래 나는 쇼핑을 즐겼고 특히 옷이나 화장품 같은 예쁜 물건을 사는 걸 좋아했는데, 그런 스스로의 기호가 싫어졌다. 내 기분을 위해 쓰레기와 탄소를 수십 톤 씩 만드는 과정을 방관할 것이냐. 대답은 당연히 NO!여야 마땅하지만, 쉽지 않았다. 새 옷에 대한 욕망을 자제하는 건, 내겐 시위에 참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실천이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식물 기르기에 관심이 갔다. 동물이나 환경을 덜 해치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곁에 둘 수 있는 훌륭한 취미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비건을 두고 ‘풀쟁이’라고 곧잘 조롱하던데, 의외로 비건 중에 식물을 기르는 친구는 드물었고 식물 키우는 사람 중에서도 비건은 드물었다. 하지만 분명 내가 식물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와 비건을 지향하는 삶 사이에는 묘한 연결고리가 있었다.
나의 첫 식물은 게발선인장이었고 이름은 ‘폴’이었다. 그는 내가 선택한 첫 식물이자 이름을 지어준 마지막 식물이기도 하다.
폴은, 2021년 1월에 죽었다. 폴을 담았던 황토색 토분은 주인을 잃고 황망히 베란다에 앉아있다. 남대문 시장에서 구매한 이후 줄곧 붉은 플라스틱 화분에 심어진 채로 살다가 몇 달 전 분갈이를 해주었던 참이었다.
2년 전이었다. 함께 살던 친구 중 한 명이 집에 식물을 들이자고 제안했었다. 그렇게 각자 키우고 싶은 식물, 담당하여 관리할 식물, 함께 유의할 사항을 이야기했다.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고양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 식물을 골라야 했다. 인터넷에서 반려동물에게도 안전한 식물 리스트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게발선인장도 그 목록 중에 있었다. 식물로서는 드물게 겨울에 꽃을 피우고, 붉은 꽃과 녹색 줄기가 조화로워서 크리스마스 선인장이라고 불린다던 게발선인장은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선인장치고는 물을 자주 주어야 하고 기온에 다소 민감하다는 점만 주의하면 초보자도 쉽게 기르는 식물이라고 블로그의 주인은 써놓았다. 그 글을 보고 짐짓 자신감을 얻어, 소형 화분에 식재된 게발선인장을 데려왔다.
그때 난 직장을 다니고 있지 않았고 프리랜서나 작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날이 밝으면 눈이 떠졌지만, 몸은 잘 일어나지지 않았다. 정신이 들면 그날 해야 하는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어느 단체나 기업에 자소서 넣기, 어느 공모전에 출품할 글을 쓰기. 대게는 그런 일들이었다. 대부분 하고 싶지 않았다.
폴이 집에 들어선 이후로 내 하루는 그를 위해 움직였다. 아침이면 환기를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해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에는 볕 아래로 폴을 옮겨주었고 물을 줄 시기가 오면 하루나 이틀 전에 미리 물을 받아놓아야 했다. 그렇게 한 차례 그의 줄기 끝에 꽃잎이 피고, 졌다. 꽃이 맺힌 폴은 매니큐어 바른 손가락 같았다.
그러고 몇 달 후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폴은 데려가지 않았다. 친구가 폴은 언제 데려 가냐고 몇 번 물었지만 그때마다 그저 ‘급한 일만 끝나면 데리러 갈게.’라고 했다. 그렇게 일 년가량을 폴과 따로 살았다.
직장을 몇 번이나 바꾸고, 결혼을 결심하고, 신혼집으로 짐을 옮겼다. 그제야 폴과 재회했다. 다시 만난 폴은 힘이 없어 보였다. 헤어지기 전부터 시든 줄기가 자주 보여서 잘라주곤 했었다. 데려올 당시엔 통통한 줄기 끝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붉은 꽃망울이 화려했는데. 애써 물기를 머금은 쭈글쭈글한 줄기가 바닥을 향해 축 늘어져 있었다.
새집에 온 폴은 두 달을 더 버텨주었다. 무심코 창문을 열어놓았던 추운 밤에, 결국 그는 냉해를 입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들어서 살아있는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가위로 늘어진 부분을 이발해주었지만, 몇 주 안 가 남은 줄기마저 모조리 힘을 잃었다. 그렇게 나는 첫 식물 식구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게발선인장은 사실 매우 예민하고 신경을 많이 써주어야 하는, 결코 기르기에 쉽지 않은 식물이었다. 애초에 ‘기르기 쉬운’ 생명이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함께 사는 동안 그의 상태를 낙관하지 말아야 했는데. 그의 조용한 요구에 신경을 기울이고 하루에 몇 번이고 그를 살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폴은 내 곁을 떠나버렸다.
남편은 게발선인장을 또 살 거냐고 물어보았다. 절대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게발선인장이라는 종을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폴이 죽었다고 해서 새로운 폴을 들여오는 짓을 저질렀다가는 언제든 그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새 게발선인장을 들이는 대신에, 하나뿐이었던 나의 게발선인장 폴을 기리고 싶었다. 그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5학년 담임선생님의 세뇌가 떠올랐다.
글을 쓰면 돼.
비거니즘과 환경을 주제로 한 작품은 여러 편 써봤다. 그것이 나만의 ‘운동’이며 지구에 사는 동물과 식물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한 개체에 주목한 글을 쓴 적은 없었다. 그들을 개별적 존재로 대하기보단, 동물 혹은 식물이라는 ‘집단’으로 여겨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폴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비록 사람이 아니었지만 한 공간에서 함께 숨을 쉬었던 식구였다. 폴뿐만 아니라 그 어떤 생명이라도 그러했다. 식당에서 이 음식에 고기가 들어가는지 질문을 하고 플라스틱을 빼달라 요구하는 와중에도, 그들은 무심하게 주변에 있었다.
그래서, 그 하나하나의 숨결을 위한 글을 쓰기로 했다. ‘동물들’, ‘털 뭉치들’, ‘식물’, ‘풀떼기들’이 불쌍하다고 말하는, 그런 뭉툭하게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낱낱의 마주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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