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별안간 못난이


    꼬박
2년 동안 나는 꼴초였다. 3년 전쯤 한 달에 개비씩 입에 대기 시작해서 2년 전부터는 틈만 나면 흡연을 했다. 담배를 피우는 내내, 담배를 끊고 싶어 했다. 길에서 지내는 고양이들이 버려진 꽁초를 가지고 논다는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다. 나는 그 글을 보고도 한참이나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진심으로는하지 못했다. 이따금 끊을 거라고 끊을 수 있다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공연한 농담처럼 가벼운 말들이었다. 비건을 시작하고도 담배는 한참 피웠다. 크루얼티 프리 비건 제품을 사는 것도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동물들의 고통에 동하여 니코틴을 떨쳐버리기엔 난 여전히 인간 중심적이었다.
    못난이가 우리 가족의 일상에 나타난 시기는 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정확히 맞물린다. 나는 학교에 다니느라 대구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모가 가게 뒷마당에서 고양이 밥을 챙겨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홀연하게, 못난이는 엄마와 이모 둘이서 운영하는 동네 미용실 뒷마당에 찾아왔다.
    “예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 못난이는 정말 못생겼지.”
    이모가 말한 예쁜 애들은 밝은 색깔 털을 두르고 날씬하고 눈이 초롱초롱한 외모의 고양이를 뜻하는 것 같았다. 못난이는 붉은 기가 감도는 갈색 털과 검정에 가깝도록 어두운 털이 자유롭게 얼룩져 있었다. 눈동자만 유독 호박처럼 밝은 노란색이었다.
    예쁜 동물과 안 예쁜 동물을 구분하고 나의 채식 선언에도 여전히 계란 먹기를 권하는 이모였지만, 못난이에게만은 지극정성이었다. 누군가 고양이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거나 캣맘을 멸시할 때 열정적으로 반박하는 모습은 사회운동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냥 귀여워하며 사진을 찍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고양이에 대한 건강 정보와 음식 정보를 종일 찾아가며 못난이를 돌보았다.
    못난이는 거의 뒷마당이나 담 너머 있는 넓은 골목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환기를 위해 문을 열어둔 날이나 지나치게 추운 날엔 종일 미용실에 들어와 있기도 했다. 단골들은 짐승에게 마음과 공간을 내어주는 이모를 괜히 조롱하고는 했지만, 못난이를 미워하진 않았다.
    그전까지는 포항에 가서 보게 되는 이들이란 엄마, 아빠, 이모, 남동생, 가끔 만나는 동창들이 다였다. 내게 포항은 닳을 대로 닳은 동네여서 그곳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 못했다. 그토록 낡은 지역, 따분한 공간, 지겨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별안간 못난이라는 뉴페이스가 입장한 것이다. 그 묘연이 신기하고 신선해서 난 미용실에 들를 때마다 못난이를 찾았고 그 노란 눈동자를 골똘히 쳐다보고는 했다.
    첫 만남에 못난이는 내 다리에 몸을 비며 그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못난이가 어릴 적부터 사람 손을 타서 경계심이 없는 줄 알았다. 남동생이나 외삼촌이 다가가면 느긋이 누워있다가도 부리나케 도망치는 걸 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덩치가 큰 사람만 보면 칼선 같던 동공이 동그랗게 커졌다. 미용실 마당으로 오기 전에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못난이가 우리 곁에 와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바깥의 동물들은 그렇게 여전히 위태롭다는 얘기구나, 생각하게 됐다. 못난이가 미용실 뒷마당에 안착한 것처럼 모든 길 위의 동물들이 폭력에서 자유로운 공간을 찾게 되면 좋겠다고 무력하게 희망했다.
    그래, 인간은 무력했다. 못난이가 크게 울며 미용실 소파 위로 양수를 터트릴 때까지도 얘가 임신을 한 건지 살이 찐 건지 긴가민가했으니 말이다. 못난이는 뒷마당에 마련한 간이 스티로폼 집에서 다섯 아이를 낳았다. 다섯 아이와 못난이는 며칠 동안 마당에서 지내다가, 어느 밤사이 다른 동물에게 공격을 받았는지 넷이 죽고 한 마리만 살아 외숙모네 집으로 갔다. 이모는 그들의 시체를 보던 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어떤 죽음은 정말로 사람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출산한 몸을 한참 풀고서, 못난이는 중성화 수술을 했다. 큰일을 여러 차례 치른 후여서일까. 그 이후부터 못난이의 표정은 묘하게 더 안정적으로 보였다. 가만 떠올려보면, 그때 못난이는 자신만의 템포로 그곳과 그곳의 사람들에게 정착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 자신은 포항에서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간 지 두 달도 안 채우고 바로 취업을 했다. 그런데 그 직장이라는 데가 무지막지했다. 신문사의 자회사였는데, 업무의 대부분이 모회사의 사업이었다. 바쁜 동시에 지루했다. 지역 신문과 지자체가 매년 꾸역꾸역 일정에 끼워 넣는 무슨 축제, 무슨 행사를 정신없이 쳐내야 했다. 일이 바쁜 것보다 힘들었던 건 사람의 괴롭힘이었다. 언어로, 눈빛으로. 어리숙함을 이유로 삼기에는 그 괴롭힘은 과했지만 아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원래는 그 사람이 나에게 한 짓을 자세히 적으려고 했으나, 전체 내용과 동떨어져 있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 속으로 푹 떨어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퇴근하고, 주말마다, 휴가마다 엄마와 이모의 미용실에 들렀다. 그때의 난 유독 못난이를 보고 싶어 했다. 누군가를 예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간식을 주고 손을 내밀어 냄새를 맡게 하고 쓰다듬으며, 내가 그를 아끼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직장에서의 나고양이를 예뻐하는 나를 분리했다. 후자를 직장 사람들과 비교하기도 했다. 난 너희들과는 다르게 다른 존재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담배는 직장을 다닌 후부터 부쩍 늘었다. 말보로 아이스 블라스트. 던힐 스위치 파인컷. 시원한 멘솔 담배로 광고를 하지만 피고 나면 시원하긴커녕 입이 텁텁하기만 한 담배들. 엄마는 내가 흡연자라는 걸 몰랐다. (지금도 모르신다.) 집 근처에서는 만하면 피우지 않았고 주로 일하기 싫을 때에 빠져나가는 핑계로 담배를 찾았다.
    잠깐 그러다가 말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담배 같은 건 피운 적도 없는 것처럼 그만둘 수 있을 거라고. 끊기 위해 피운다는 이상한 논리가 내게는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미용실 뒷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 보았다. 못난이는 담장 위에서 졸고 있었다. 아빠와 못난이 사이는 꽤 떨어있었지만, 아빠 입에서 뿜어지는 연기가 꾸벅거리는 못난이 얼굴 근처까지 두둥실 흘러갔다. 나는 어쩌면 대수롭지 않았을 그 광경이 적잖이 불편했다. 왜 고양이가 옆에 있는데 저기서 담배를 피우는 거야? 아무리 무심하대도 저렇게 배려가 없을 수가
    아빠는 담뱃불을 지져 끄고 꽁초를 안으로 들고 와 쓰레기통에 버렸다. 길바닥에 버린 꽁초를 고양이들이 가지고 논다는 이야길 듣더니 아닌 척하면서 꽁초를 아무 데나 던지는 버릇은 때려치운 듯했.

    그 일련의 행동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다른가? 나도 거리에서 담배를 피운 적 있다. 많다. 꽁초는 꼬박꼬박 쓰레기통을 찾아서 버렸다. 지나가던 고양이나 개가 모르고 밟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담배를-높은 확률로 동물 실험을 강행하여 만들어졌을 담배를 사서 태우는 내가, 아빠보다 도덕적이고 동물친화적인가? 물음표는 한참 사그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식구 못난이는 마치 별안간 우리에게 뿅 나타난 존재 같았지만 사실은 사람과 같은 선상에 살고 있다. 못난이가 태어나고 영역을 찾아내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잃고 잠을 자고 깨는 동안, 나는 그에게 과연 무해한 영향만을 미쳤을까? 멀리서 뿜어댄 나의 담배 연기가 흐르고 흐르다 재해로 뭉쳐져 그에게 닿지는 않았을까? 아무리 쓰레기통에 버렸어도 내가 던진 담배꽁초들이 한 군데로 모여서 바다든 땅이든 오염이 되고, 오염된 물과 흙을 결국 못난이도 마시고 밟게 되는 거 아닐까.
    이 물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졌다. 포항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고, 못난이는 여전히 뒷마당에 산다. 그 사이에 나의 흡연량은 급격히 늘어났다가, 조금씩 줄었고, 지금은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고 있다. 처음부터 담배 같은 건 피우지 않았던 것처럼-그러니까 담배로는 전혀 지구에 해를 끼치지 않았던 것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금연 중이기는 하다.
    최근 오랜만에 포항으로 갈 일이 있었다. 시간이 없어 못난이와는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다. 못난이는 변함없을 것이다. 손을 내밀면 코를 대고 냄새를 맡다가 볼을 문지르고, 간식을 꺼내면 목이 빠질 것처럼 빳빳이 고개를 들고, 근처에 서 있으면 무심하게 몸을 다리에 스윽 부비며 지나쳤을 것이다. 못난이는 더 이상 별안간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내 고향의 일부이고, 함께 땅에 발을 내린 채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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