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미안해서 미안한 짜이

 

    동물을 귀여워하는 마음에는, 항상 뻐근한 죄책감이 뒤따른다. 그 어떤 동물이라도 마찬가지지만, 고양이와 강아지는 쉽게 물화 된다.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은 ‘애완’, 사랑하는 장난감이라 불리며 외모와 행동을 나노 단위로 관찰 당했다. 그들을 조각조각 내어 소비하는 양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웰시코기의 엉덩이를 확대한 굿즈, 고양이의 발바닥 모양의 키링, 그들의 귀와 꼬리를 형상화한 액세서리들이 그 증거다.
    나 또한 동물 대상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양이를 보면 예쁘고 강아지를 보면 사랑스럽다. 동물 모습인데 인간처럼 구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화를 재미있게 보고 동물들의 어떤 행위를 담은 동영상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동물을 단순히 어여삐 여기는 것과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이다. 스스로가 이렇다 보니, 동물을 귀여워하는 행위 자체를 무작정 비판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차는 걸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동물을 돌보거나 그들의 권리를 우선시하지도 않으면서 ‘귀여움’만을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고양이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정말 흔해서 진저리가 난다. 고양이가 불편해하는 모습을 귀엽다고 동영상으로 남긴다든지, SNS에는 고양이를 예뻐하는 멘트를 남기면서 실제로는 화장실도 제때 치워주지 않는다든지. 온전히 그의 삶을 책임질 각오가 없다면, 귀여운 겉모습만을 취하고 싶은 거라면 한 생명을 집으로 들여와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난 절대, 고양이든 강아지든 반려동물과 함께할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보다 훨씬 연약하고 작은 생명을 돌보는 게 자신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언급한 고향의 마당냥이 ‘못난이’를 돌보는 이모를 보며 그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이모의 하루는 못난이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못난이와 떨어져 있을 때도 고양이의 건강관리에 대해 찾아보는 게 일과였다. 최소한 이모만큼은 돌봄 노동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울로 독립을 했다. 짧은 직장 생활에서 모은 돈으로는 자취를 할 수 없었기에, 친구들이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집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다. 짜이와 이락이였다. 서울 집에 도착한 첫날, 침대에 엎드린 그들을 마주하고 나서야 실감했다. 내가 고양이와 같이 살게 되다니!
    동물과 같이 산다는 건 필연적으로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짜이와 이락이의 ‘보호자’라는 정체성이 희미했다. 애초에 친구들과 먼저 같이 살고 있던 구성원이어서, 한동안은 ‘친구들과 같이 사는 고양이 두 마리’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

    그중에서도 짜이는 더욱 살뜰한 보살핌이 필요한 고양이였다. 짜이는 귀가 들리지 않았고, 선천적 난청이어서 다른 개체에 비해 사회화가 서툴게 진행된 아이였다. 내가 함께 살기 시작할 때쯤에는 분리불안도 가지고 있었다.
    짜이는 유독 목소리가 컸다.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더 크게 울부짖는 것 같았다. 그렇게 큰 목소리로 짜이는 하루에 몇 번이나 째앵 째앵 울어댔다. 사람이 제 시야에 없다가 들어오면 그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며 울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짜이를 달래주려는 심산으로 배와 등을 쓰다듬곤 했다.
    그러던 중에, 짜이의 분리불안을 피부로 직접 느낀 날이 있었다. 직장이 멀어서 친구들 중 가장 일찍 일어나야 했던 시기였는데, 그때쯤 고양이들의 아침 식사는 거의 내가 챙겨주고 있었다. 그날도 배고파서 날 쫓아오는 고양이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그릇에 사료를 담고 있었는데, 무언가가 내 아킬레스건을 콕! 하고 찔렀다. 아프기보다는 정말 조그만 막대기에 콕 눌린 느낌 정도였는데, 몽롱한 정신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내려다보니 짜이가 애앵- 애앵- 울면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짜이의 상태에 크게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짜이에게 분리불안이 있다’고 친구들이 말하니까, 그런가 보다, 관심을 더 기울여야겠다고 ‘생각’만 했다. 짜이가 내 아킬레스건을 깨문 날에야, 고양이의 분리불안에 대해 조사를 했다. 분리불안이라고 더 만져주거나 안아주는 건 오히려 독이며, 독립성을 키워주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나 쉽게 알 수 있는 정보를, 찾아보려 하지도 않고 나 편한 대로 짜이를 대했구나. 기껏 해야 콕 깨무는 정도로 불만을 표할 수밖에 없는 짜이에게 충분히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미안함이 몰려왔다. 너무도 손쉽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더 미안했다.
    짜이의 분리불안을 직시하고 나서, 고양이들을 전보다 더 신경 쓰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그들은 각각 다른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락이는 건너건너 알고 있는 지인과 살고 있어 이제 거의 소식을 접할 수 없게 되었는데, 짜이는 나와 친한 친구 달프의 집으로 이사를 해서 자주 근황을 전해 듣는다

    어느 날 밤, 기억하기로는 대강 2020년 연말이었다. 한 해가 끝나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가라앉아있던 터였다. 집에서 술을 조금 마시고 있었는데, 달프가 짜이의 영상을 보내며 안부를 전했다. 인정과 함께 영상 속 짜이를 보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짜이가 너무 보고 싶어.”
    진심이었다. 짜이의 귀여운 얼굴이나 몸이 아닌, 짜이가 보고 싶었다. 짜이가 옆에 있던 그 집으로 돌아가 이전보다는 훨씬 모범적인 태도로 그를 돌보고 싶었다. 짜이가 나와 함께 하는 동안은 평화와 안전을 느꼈다면 좋았을 텐데, 과연 그랬을까? 짜이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보고 싶은 마음만 공연히 커지는 밤이었다.
    내가 보고 싶어 하거나 말거나, 지금 짜이는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장난감과 캣타워를 주문했다거나 꼬박꼬박 병원을 다녀오느라 진을 뺀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인정은 짜이가 달프와 같이 살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나 또한 크게 공감했다. 짜이에게 그의 묘생을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는 반려인이 곁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으로 느껴진다. 짜이는 지방에 살고 있는데, 언젠가 꼭 그를 만나러 갈 것이다. 장난감과 간식을 잔뜩 사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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