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유서도 살아 있어야 쓰는 것이다 (상)
- 우잘살: 한소리(출판)
- 2021. 3. 31. 13:59
누군가에게 뜬금없이 사랑한다고 문자를 보냈을 때, 읽음 표시가 뜨자마자 바로 전화가 걸려 오는 것은 꽤 슬픈 일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얼마 전에도 수자에게 “엄마, 사랑해”라는 카톡을 보냈는데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윤희에게 보낼 때도 그랬었다. 그들은 내가 혹여 죽음의 문턱 앞에 서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다.
나는 우울증을 앓았다. 과거형은 아니다. 지금도 꾸준히 신경정신과에 내원하며 약을 받고, 약 없이는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지금은 스스로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해 알고 있는 상태이며, 그것을 잠시라도 극복해낼 방법을 알기 때문에 앓았다, 고 쓰고 싶었다.
우울증은 전조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당시 나는 사이버 대학교에 재학하며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오렌지주스 병을 끌어안고, 당구장 텔레비전으로 박근혜 탄핵 방송을 보며 울던 기억으로 보아, 아마 2017년 3월 10일 즈음이었을 거다. 그날 이후로 나는 우는 법을 잃어버렸다. 누가 훔쳐 간 것 같은데, 범인이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잊은 것은 아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니까. 내가 그럴 리가 없다 끝없이 되뇌던, 부정기였다.
*
오전 11시. 나는 출근한다. 항상 그랬듯 출근하자마자 가게 간판을 켜고 화장실로 들어가 물청소를 한다. 다른 때보다 화장실 상태가 좋지 않아서, 청소하는 내내 숨을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혼자 투덜거린다. 젖은 고무장갑을 세면대에 걸쳐놓고 냉장고로 향한다. 그날 사용할 수 있는 음료의 양이 어느 정도 되는지 눈대중으로 측정해본다. 아이스티가 들어 있는 페트병은 열 통이 넘는데, 아이스커피가 들어 있는 페트병은 고작 두 병이다. 아이스티였다면 훨씬 더 쉬웠을 텐데. 나는 연달아 틱틱대며 커피, 설탕, 프림을 커다란 쇠 주전자 안에 넣는다. 뜨거운 물을 받고, 나무 주걱으로 열심히 안을 저어댄다. 그렇게 다음 날까지 사용할 수 있는 아이스커피 페트병이 만들어진다. 냉장고를 정리하고 손을 탈탈 턴다. 검은 티셔츠에 프림이 조금 묻어 있다.
어른들이 슬퍼 보여 그들은 정말 행복하지 않아.
Red velvet, <행복>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는 단골들이 그날따라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아주 간혹 나오지 않고 쉬는 날이 있다던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추측해본다. 사람이 없어 조용한 당구장 실내가 내 마음에 든다. 휴대폰으로 노래를 마음껏 틀어놓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좋아하는 레드벨벳의 노래를 앨범째로 재생하고 천천히 당구장 바닥을 물걸레질한다. 가장 먼저 들려오는 노래는 레드벨벳의 <행복>이라는 노래다. 전주에 맞춰 응원법을 외쳐대면서 당구대 사이를 구석구석 닦는다.
다 흘려버린 아이스크림같이 이러다 녹을지 몰라……
Red velvet, <빨간 맛>
플레이리스트는 인기 순으로 재생되고, 이번에 흘러나오는 것은 동일 가수의 <빨간 맛>이라는 노래다. 여름에 발매된 곡으로, 아주 큰 인기를 끌며 히트한 만큼 멜로디가 통통 튀고 신나며, 또 시원시원하다. 나는 이 노래의 응원법도 알고 있어서, 또 홀로 응원 구호를 외치며 리듬을 탄다. 지나온 당구장 바닥이 햇볕 때문인지 벌써 다 말라 있다.
그러니 말해, 그러니 말해. 너의 색깔로 날 물들여줘. 정확히 이 구절이 나올 때 나는 볕이 들지 않는 당구장 구석의 바닥을 걸레질하고 있었고, 기분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왈칵 눈물이 터졌다. 왜지? 왜 갑자기 내가 울고 있지? 이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눈물은 광대를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조금만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이때 내가 흘린 눈물은 대걸레를 흠뻑 적실 정도였다. 나는 울 때 정말 엉엉 크게 소리 내어 우는데, 그것 때문에 남들 앞에서 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정말 누가 죽은 것처럼 운다니까, 하고 말하던 친구들의 표현도 한몫했다.
다리에서 힘이 쭉 풀린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애써 닦아놓은 바닥이 다시 엉망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울기만 한다. 우는 내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 분 정도를 울다가, 방전된 배터리처럼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친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걸레를 쥐고 바닥을 마저 닦기 시작한다.
*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우울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죽고 싶다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대신 무력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자신도 모르게 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시절 나의 유일한 욕망이었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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