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유서도 살아 있어야 쓰는 것이다 (하)
- 우잘살: 한소리(출판)
- 2021. 4. 7. 13:57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쓰지 않아도 되는 일기는 없을까?”, “왜 나는 일기를 매일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내일이 없는 사람에게 일기가 정말 필요한 걸까?” 등의 생각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어떠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끔 했다. 바로, <아는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한 첫 번째 프로젝트, <유언집>이었다.
크라우드 펀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때라, 나는 프로젝트 하나를 올리기 위해 아주 많은 실패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면서, 이 프로젝트가 정말 있어야 할까? 타인에게도 유의미할까? 라는 걱정 또한 불어났다. 그러나 그 걱정은 곧 말로 표현 못할 벅참과 묘한 감정으로 내게 돌아왔다. 트위터에서 <유언집> 펀딩을 보고 많은 사람이 공감해주었고, 감사하다는 인사와 그간 자신이 겪은 자책과 자괴의 경험을 함께 털어놓았다.
<유언집> 프로젝트 소개 글은 다음과 같다.
저는 20대 여성이자 퀴어이며, 4년째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입니다. 몸에 있는 수많은 문신은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려 했던 시도의 횟수와 꽤 비례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살아가고, 그런데도 살고 싶다는 저항의 흔적입니다. 아는 사람 모두가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아는 사람>의 첫 프로젝트인 <유언집>을 기획하고 진행하게 되었습니다.나를 태어나게 한 존재에 대해 골몰한 적이 있습니다. 신이 있다면 어째서 나를 태어나게 했으며, 어째서 삶의 시작에 내 동의는 없었는지에 대해 오래 생각하며 원망하던 나날들이 있었습니다.오늘만 잘살아보기로 결심합니다. 내일은 죽을 것 같으니 오늘은 꼭 할 수 있는 것을 원 없이 해보기로 다짐합니다. 그러면 내일이 옵니다. 내일은 또 오늘이 되며, 오늘의 내일은 또 오늘이 됩니다. 아이러니한 감각입니다.만성이 되어버린 우울증을 앓으며 내가 너무 힘들게 사는 건 아닌지에 대해 수천수만 번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계획을 세웁니다. 오늘은 무엇을 하고 내일은 무엇을 하고, 다이어리를 통해 월 계획을 세워 활동해보자는 마음에서였습니다.그러나 저는 하루가 지나면 그걸 쓸 힘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하루만 밀려도 꼭 매일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누군가 내 일기를 보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밀릴수록 나 자신이 한심해지는 일에 대하여 반성하고 또 반성합니다. 그러던 중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유언집>입니다.유서도 살아 있어야 쓰는 것이다. 제가 늘 외치던 말입니다. 우리는언제 죽을지 모르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우울을 앓습니다. 유언을 남기고 싶은 날. 오늘은 잘살아 보고자 하는 날. 내일의 일기가 부담되는 날. 혹은 내가 느낀 여러 감정을 기록하고 싶은 날.다시는 쳐다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향후 이 일기는 당신의 유언이 되어 아주 오래 남을 것입니다. 쉽게 변하고 잊히는 말들과는 다르니까요. 우리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기분을 유언으로 남김으로써 하루 더 살 수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우리는 미련이 남지 않을 것이며, 더욱 급하지 않은 생의 여유를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매일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유언은 일기와 다르게 매일 남겨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작성할지 말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유언집 한 권이 모두 빼곡히 채워지면 저는이미 한번 죽었다 살아난 느낌이겠지요.그렇다면 두 권을 쓰겠습니다. 그마저도 다 쓴다면 세 권을 쓰고,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쓰겠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우리는 이상한 사람, 특이한 사람, 위험한 사람, 피해야만 할 사람이아닌 그저, 누군가의 ‘아는 사람’입니다. |
*
내 몸은 21살까지 깨끗했다. 문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소리다. 그러나 하나둘씩 문신이 생기기 시작한 뒤로 나는 문신 받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수자는 속상해했다. 왜 몸에다 그런 걸 하고 그래, 진짜 속상하게. 시집은 어떻게 갈 건데. 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거야.
*
배경: 2019년 어느 날
인물: 소리, 수자
소리, 수자에게 <유언집> 프로젝트 링크가 담긴 메시지를 보낸다.
수자는 메시지를 확인한 뒤, 한참 동안 소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소리, 조용히 집에 들어와 조용히 방에 가서 조용한 상태로 있다. 수자는 소리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수자는 소리에게 할 말이 없으며, 할 말이 생기더라도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어려워한다. 수자는 지금껏 소리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소리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다. 있어도 나 힘들고 너 힘들고 모두 힘든데 왜 유독 너만 그러냐는 말만 많이 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수자, 글을 다시 읽는다. 온종일 반복해 읽는다. 방에서 나오는 소리를 본다. 반팔을 입은 소리를 본다. 노트북 백팩을 메고 현관을 나서는 소리를 본다. 소리 양팔에 빼곡히 그려진 문신을 본다. 수자는 소리가 카페에서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린다. 밤이 되고 더 들어올 사람이 없을 시간이 돼서야 소리가 온다.
수자는 대뜸 소리를 끌어안는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한다는 생각과 의지에 매료되어 행동한다. 소리가 어색하게 묻는다. 왜 이래. 뜬금없이. 수자가 대답한다.
수자: 그래서 네가 그렇게 몸에 그림을 많이 그렸구나…… 그게 다 아파서 그런 거구나…… 힘들어서…… 나는 그것도 모르고…….
소리는 슬며시 수자를 밀어내고 방으로 들어간다. 방문이 굳게 닫힌다. 굳게 닫힌다는 건 이런 거구나. 굳게 다친다는 말도 이럴 테지. 수자는 생각하고 소리는 웅크린다. 담뱃재 수북이 쌓인 창틀 아래 소리가 있다. 어깨를 들썩이는 소리가 있다. 그럴 때마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하얀 재가 있다. 필터까지 닳은 담배꽁초가 있다. 소리가 운다. 아침이 언제 오는지도 모르고. 해가 뜨고 나서야 소리가 몸을 편다. 가장 편한 자세로. 만약 죽는다면 이런 자세로 죽어야지. 이대로 관에 들어가야지. 생각하며 소리가 눈을 감는다.
수자는 출근한다. 출근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일터에서, 점심을 먹는 마트 창고에서, 소리가 보냈던 링크를 눌러 글을 읽는다. 수자는 집에 가서 소리가 책을 배송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마음먹는다. 집에 오는 걸음걸이가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
극장에서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온 수자는 말했다. 그래도 김지영이는, 좋겠더라. 자기 사랑해주는 가족들 있고. 71년생 추수자는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살아왔지? 95년생 한소리는 꼭 행복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71년생 수자도 잘 살았잖아, 라고 말하기에는 죄책감이 들었다.
*
“소리야, 엄마도 유언집 한 권 줘.”
“그래. 엄마도 쓰게?”
“몰라~ 그냥 하나 줘.”
*
추수자
보조개가 쏙 들어가 예쁜 너
너를 사랑하는 소리, 윤희, 이랑이 있잖아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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