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그 예쁘던 애는 어디 가고 2

 

    “엄마, 어떡해? 나한테 번호 달래.”
    여기서 문제. 수자는 어떤 대답을 했을지 고르시오.

    ⓐ 미안한데 내가 얘 엄마거든요.
    ⓑ 뭘 줘, 빨리 가자.
    ⓒ 기타 (이 항목 선택 시 아래 댓글에 자유롭게 생각을 적어 주세요)

    지난번 냈던 문제의 선택 항목이다. 의외로 댓글이 많이 달리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은근슬쩍 물어본 결과(웃음…) ⓑ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나라도 그랬을 거다. 그 자리에 있던 나조차 당연히 ‘수자가 이런 걸 받아들일 리 없지…’라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런데, 실제 대답은 황당했다.
    “몇 살인데요?”
    수자의 물음에 그 남자는 나이를 이야기했고,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수자는 홍홍홍(이렇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말 저 단어 말고는 그 웃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글자가 없어 슬프다) 웃으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줘라. 홍홍. 번호 홍홍홍…”

    어찌 됐든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녀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고 그는 말했다. 너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 술집이니, 당연히 상사나 직장 동료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수자에게 전해주자 수자는 즐거워하며 좋아했다.
    “내가 좀 동안이긴 하지 홍홍홍…”

    아무튼 그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이 일보다 훨씬 무례한 일들도 많이 생겨났다. 아르바이트하고 있는데 번호를 달라고 하는 사람, 거절했더니 계속 추궁하며 퇴근 이후까지 따라오며 물어보는 사람, 여자친구가 있다니까요, 저 레즈비언이라니까요? 이야기하면 거짓말하지 말라는 사람, 아니면 레즈라도 연락만 해보라,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고집하는 사람, 당시 만났던 여자친구의 전화 통화를 스피커로 돌려 화를 내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사람들……

    나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때부터 생겨난 것 같다.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특정한 색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생겼던 것은. 아침에 일어나 심각하게 붕 뜬 곱슬머리를 두 시간 동안 고데기로 펴고, 거동이 불편한 옷을 입고, 눈에도 좋지 않은 미용 렌즈를 종일 끼고, 화장품을 들고 다니며 수시로 거울을 보고 얼굴을 고치고, 그런 모든 일에 지쳐 “그냥 좆대로 살고 싶다…”라고 생각했지만 나 역시 등산을 시작하기 전 수자와 다르지 않았다. 좆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깎여버린 자존감을 이러한 꾸밈 없이도 높이는 법을 몰랐고, 살이 쪘다고 나를 돼지라고 놀리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며 화를 내야 하는지도 몰랐고, 아니 화를 내도 되는 건가?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니냐는 생각에 휩싸여 결국은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고, 이러다 죽을 때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다가……


    머리를 잘랐다.
    충동적으로 한 일이었다. 그날 나는 노트북을 들고 늘 가던 단골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갓 나온 커피를 빨대로 휘휘 젓다가 문득 ‘머리를 지금 당장 잘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말한 적 있듯, 때가 되면 울리는 종이 소릴 내기 시작한 거다. 나는 그대로 짐을 꾸려 노트북을 다시 가방에 넣고, 커피를 원샷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와 카페 건너편에 있는 미용실로 향했다. 사람이 많았다면, 기다리는 동안 결정을 번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사람이 없어서 나는 짧은 대기 끝에 미용실 의자에 안착했다. 미용사는 물었다.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나는 대답했다.
    “숏컷으로 잘라주세요.”
    미용사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깝지 않아요? 하긴, 요즘 여성분들 숏컷이 유행이긴 하죠. 그럼 이 뒷머리를 여성스럽게 잘 정리해서……”
    나는 고개를 저으며 힘주어 말했다.
    “여성스러운 커트 같은 거 말고요. 그냥 남자 머리 자르듯 잘라주세요.”

    그 후로 미용사는 내게 몇 번이나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었고,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긴 머리를 짧게 치기로 결정한 거냐고, 혹시 남자친구와 헤어졌냐고 재차 물어댔고 나는 침묵했다.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숏컷을 했다.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이전에 숏컷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모두 적극적으로 나를 말렸다. “너는 절대 숏컷이 안 어울릴 것이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지만 늘 자신에게 어울리고, 자신에게 맞는 것만 오래 쓰다 보면 결국 깊은 우물 속에 빠지는 것과는 다름없다 여긴 나는 언젠가 꼭 하리라 다짐했었다. 그게 그날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 후로 친한 동생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고 매우 놀랐지만, 의외로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잘 어우러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고데기를 포기했다. 심한 곱슬머리에 손상된 얇은 머리카락. 그런 머리는 숏컷하면 진짜 관리 안 돼요, 라는 말들을 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나왔다. 거짓말.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이 아주 짧다는 것과, 머리를 말리고 살살 겉만 펴주기만 하면 준비가 다 끝나는 머리를 보고, 적어도 나는 숏컷하면 안 되는 머리, 숏컷하면 안 되는 얼굴 등의 말들은 전부 거짓이었다 판단 내렸다. 그렇게 나는 머리카락의 구속에서 벗어났다. 삶이 조금 더 편해졌다.

    이후로 나는 딱 달라붙는 티셔츠 대신 박스티를 입었고, 짧은 바지보다는 편한 긴바지나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짧은 머리에 원피스나 치마, 블라우스 등을 입는 것은 안 어울린다는 나의 선입견과 잘못된 편견 때문이었지만, 효과는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움직이기 편해지니 더욱 활동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크롭티를 입기 위해 살을 빼고 무리하게 굶는 일이 사라졌다. 그렇게 편한 옷을 입게 되다 보니, 높은 힐을 신어 다리가 길고 예뻐 보이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어져서, 나는 옷의 구속에서도 벗어났다. 두 번째의 해방이었다.

    머리와 옷이 편해지니, 차림에 알맞게 얼굴 화장도 변해갔다. 기다란 속눈썹과 마스카라, 아이섀도와 아이라인을 포기하고 눈썹만 대충 그렸다. 너무 붉은 입술이 괜히 어색해 색이 연한 립밤으로 화장품을 바꾸었다. 렌즈를 사용하는 날도 서서히 줄었다. 그렇게 나는 화장의 구속에서까지 벗어났다. 이것은 세 번째였고,

    마지막 남은 것은 타인의 평가였다. 이는 나의 자존감과 직결된 문제였으므로, 나는 나 자신을 보다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자 노력하였으나 절대 쉽지는 않았다. 어려웠던 이유 중 가장 영향이 셌던 것은, 바로 수자였다.

    “그 예쁘던 애가 왜 선머슴처럼 변해서는……”
    “너 살쪘니? 아후 돼지. 살 좀 빼. 예전엔 참 예뻤는데……”

    이런 말들은 집에 있을 때 내 뒤를 하루 종일 따라붙으며 나를 괴롭혔다. 커다란 투견에게 집중 공격을 받는 기분이었다. 말 몇 마디뿐이었는데 그 말들은 나를 굉장한 스트레스 속으로 밀어 넣었고, 아무리 바깥에서 사람들의 신경과 평가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어처구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진짜 왜 그래? 난 지금이 훨씬 좋아.”
    “아 좀, 그러지 마! 내가 좋다잖아. 난 살쪄도 돼. 지금 내가 좋다고!”
    “제발 그만 좀 해주라…….”

    “꼴도 보기 싫어 죽겠어. 저리 꺼져! 썩 사라져!”

    *

    “내가 그랬니? 진짜?”
    “그럼 누가 그래? 나 완전 짜증났었어. 엄마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홍홍홍… 미안해, 소리야.”
    “아 그렇게 웃지 마라 진짜!”
    “엄마가 그땐 잘못했어. 난 그래도 울 소리가 젤 좋다.”
    “언젠 꼴 보기 싫다고 창피하다면서?”
    “말이야 그렇지.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자랑스러운 앤데?”

    *
    고작 변한 건 이것뿐인데, 나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① 홍대 거리를 지나갈 때 클럽에 오라고 잡지 않는다. ② KT 대리점 직원들이 다가와서 스티커 붙여달라고 말 걸지 않는다. ③ 택시에서 아저씨가 예쁜 아가씨 어쩌고저쩌고 그런 말 하지 않는다. ④ 매일 오전 1시 우리집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나를 기다리다 자위하던 남자가, 나를 보고 도망간 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⑤ 어딜 가든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는다. 특히 성적 대상화 눈빛 레이더에 걸려드는 일이 없다. ⑥ 레즈라고 말하면 바로 믿어준다(이게 가장 어이없지만 사실이다. 심지어 말 안 해도 레즈인 거 아는 사람도 많다. 억울하고 웃기다.) 그리고,

    ⑦ 내 모습이 어떻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댓글(1)

  • ㅇㅇ
    2021.05.12 11:10

    에세이 늘 잘 읽고 있어요. 어떤 모습이든 소리님은 사랑이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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