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 녹아내리는 프랑스 시: 시간결정
- 2021. 5. 7. 11:00
향기
내 마음은 떠다니는 향기들로 가득한 궁전
이따금 내 기억의 주름에서 잠드는 향기들
그리고 숨어있던 꽃다발들이 불현듯 깨어나고
향주머니가 옷장의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듯 스며드네
나의 사라진 쾌락들의 수의를 들어올려
슬픈 붕대들을 해방시키자...
섬세한 힘으로, 마음을 환기해주는 신들인, 향기들이여,
그대들의 풍요로운 향로들이 내 쪽으로 연기를 뿜을 수 있게 내버려 둬주시기를!
4월의 꽃냄새, 베어진 풀이 말라가는 계절의 내음,
축축한 방들에 피어오르는 첫 불길의 향수,
오래된 집들에 퍼지는 아로마,
그리고 빳빳한 벨벳 벽지에 몽롱해지고
빵 굽는 화덕에서 새어나오는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맛,
어둠의 모음집으로 나른하게 만드는 향,
나뭇가지의 냄새를 일깨워주고 탄식하게 하는
흐릿해진 우리 젊은 사랑의 기억
당돌한 신성모독을 부추기는 포도주 향기,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는 곡식과 향내의 온화함,
푸른 붓꽃 진액, 백단향 가루,
부드러워진 땅의 고조되는 향취
해초와 소금기로 가득한 바다의 미풍,
포근하게 둘러싸인 붐비는 헛간과
미사 경본 페이지들의 혼란스럽고 금욕적인 무감각함,
소나기가 내린 뒤 비료가 되는 토양의 톡 쏘는 거름까지
새벽 숲의 내음과 열기 어린 과수원,
막 한 빨래에서 느껴지는 취할 듯한 신선함,
익숙한 향으로 생기를 주는 박하와,
들보에 오르며 노래하는 차(茶)의 수증기!
내 마음속에는 악행이 방황하는 공원과,
라일락이 시드는 투명한 화병들,
성스러운 회나무 가지가 잠드는 성직자의 어깨 띠,
독약이 든 작은 병들과 세속적인 마음의 향료가 있어.
너무 일찍 딴 과일은 돗자리 위 외진 구석에서
천천히 익어가고,
낙과의 날카로운 향기는
잘 보이지 않는 깊은 상처를 가로질러 새 나온다...
그리고 밤에도 깨어있는 나의 또렷한 시선은
미르라가 향기롭게 하는 비밀스런 지하 묘지를 알고 있지,
바래고 작아지는 나의 애처로운 과거가 머무는 곳은
타오르는, 여전히 뜨거운 잿더미.
나는 바람이 흩뿌리는 시원한 향기의
숨과 흐름을 마시며 나아갈 거야,
그리고 즐거운 발걸음으로 내 마음을,
물방울이 타는 동방의 꽃병으로 만들 거야...
원문 링크
https://www.poesie-francaise.fr/anna-de-noailles/poeme-les-parfums.php
민주
노란 붓꽃
오늘의 시 <향기>는 선명하기도 아지랑이 같기도 한 향기의 순간들을 포착해 편선지처럼 엮어서 보여준다. 11연이라는 길이감 덕분에 열한 장의 일러스트를 감상하는 느낌도 들었는데, 뒷면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일기장에 끼워 넣거나 언제든 말을 걸고 싶은 존재에게 몇 자 적어 보내고 싶은 기분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에 내게 이 시는 빳빳하고 서걱서걱한 질감의 아이보리 색 엽서였다. 자기만의 방과 자연 등 여러 공간 속에서 피어나는 표현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고 가장 마음을 사로잡은 건 죽음과 관련한 단어들, 그러니까 잿더미, 묘지, 수의, 슬픈 붕대였다.
시에서는 ‘푸른 붓꽃’이 등장한다. ‘iris bleu.’ 아이리스로 친숙한 꽃. 이히스. 무지개의 신. 노란 붓꽃은 시를 곱씹을수록 내 마음속에서 더 널리 날리는 꽃가루의 주인이다. 노란 붓꽃은 6월 6일의 탄생화다. 우리 가족이 사랑했던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날은 6월 6일이었다.
버디는 한 살 즈음에 우리 집에 왔지만 그의 정확한 생일이 언젠지는 몰랐다. 버디 첫 주인이 한창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나이였던 버디를 방치했고 얼렁뚱땅 우리에게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2005년생 천방지축 버디는 철이 들고 우리 남매가 어른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 집 보스직과 사랑둥이직을 겸하다가 떠났다. 마지막에 암 투병으로 아팠던 게 내내 마음에 걸린다. 그 작은 몸의 번개 같은 고통을 주사 한 번으로 끝내주지 않은 건 인간의 욕심이고 미련이지 않았을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동생은 화장하러 들어간 버디의 마지막을 보고 ‘뜨겁잖아, 뜨겁잖아…’라고 말하며 목 놓아 울었다. 그 말이 맞다. 여름의 초입이어서 그냥 공기도 꽤 더웠기 때문에, 버디가 무지개다리 입구로 가기까지는 너무나도 더웠을 것이다.
버디가 총총 걸어 다니던 집이라는 공간에서는 엄마가 특히 슬퍼했기 때문에 나는 공원 벤치에서 우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울고 애도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마음을 돌보기 더욱 힘들었다. 좋아하는 계절인 여름이 다가오는데 기분은 바닥을 쳤고 버디를 안고 쓰다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버디의 생일을 기념할 수 없어서 슬펐기 때문에 기일을 기념하기로 했고 버디가 떠난 날의 꽃은 노란 붓꽃이라는 걸 알았다. 국화꽃 같은 얼굴에 황금빛 털을 가진 버디의 꽃인 노란 붓꽃. 아이리스가 우리 강아지의 하늘 여행을 영원히 지켜줬으면 좋겠다.
어떤 감각은 마음에 외면할 수 없는 자국을 남긴다. 향기로운 소재로 엮어 내려간 글자들이 돋보이는 오늘의 시는 후각뿐만 아니라 뺨을 스치는 촉각, 바다의 짭조름한 바람이나 차의 수증기 같은 축축함도 느끼게 해준다. 나는 그 축축함에서 슬픔과 그리움을 느꼈지만, 초조함이나 설렘, 오싹함까지도 느낄 독자들이 있을 줄로 기대하며, 오늘의 감상을 마친다.
작가소개
안나 드 노아이유 Anna de Noailles (1876~1933)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1901년 출간한 첫 시집 『헤아릴 수 없는 마음 Le cœur innombrable』 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시집 『사랑의 시들 Poèmes de l'amour』(1924)을 비롯 소설과 자서전을 남겼다. 공쿠르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상이 불발되자 여성 심사위원들로 구성된 페미나 문학상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프랑스어 문학을 드높인 공로로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수상하고 프랑스 내 최고의 명예로 꼽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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