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즐길 시간
- 녹아내리는 프랑스 시: 시간결정
- 2021. 5. 21. 11:00
삶을 즐길 시간
벌써 타오르는 듯한 삶은 저녁을 향하여 기울어가
너의 젊음을 들이쉬렴,
시간은 짧아 포도밭에서 양조장으로 가는 시간도,
어스름 새벽이 저무는 하루로 가는 시간도.
주위의 향기들에, 일렁이는 움직임들에
네 영혼을 계속 열어둬,
노력을, 희망을, 긍지를 사랑하렴. 사랑을 사랑해봐.
그게 오묘한 거야.
살아있는 마음들이 은둔의 집으로
얼마나 많이 떠나버렸나,
꿀도 마시질 않고
이 땅의 아침바람도 느껴보지 않은 채,
얼마나 많이 떠났나 이 밤에
검은 딸기 뿌리와도 같은 이들은,
태양이 펼쳐졌다가 접혀드는
이 삶을 맛보지도 않았지!
그들의 두 손 가득했던 금과 본질
쏟아내질 않았어,
그들은 지금 여기에 있지 우리 잠드는 이 그늘 속에
꿈도 활력도 없이.
너는, 살아가, 끝없이 나아가,
희망과 전율, 황홀의 힘으로,
인간이 섬겨야 할 길에 의지해,
너의 영혼은 그릇과 같으니.
세월의 재간에 헝클어진 삶,
모질고 거칠어진 그 삶을 너의 품에 맞붙여 꼭 껴안아.
기쁨과 사랑은
너의 입매 위 꿀벌 떼들처럼 노래하네.
그리고 바람난 연안이
네 마음과 허락을 받아내고는
후회 없이 고통도 없이 달아나는 걸 지켜봐
그 영원한 밤에...
원문 링크
https://www.poesie-francaise.fr/anna-de-noailles/poeme-le-temps-de-vivre.php
다은
이따금 뿌연 안경을 먼지 한 톨까지 닦아서 다시 쓴 것처럼 만물이 선명하고 생생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땐 그저 바람에 흩날릴 뿐인 잎사귀들도, 낡고 오래된 건축물들도 운치 있게 느껴지고, 촌스럽기만 하던 우리 동네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 선명함이 좋아서 이제는 바삐 걷다가도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후 멀리 바라보곤 합니다. 잠시 서서 흘러가는 구름과 파란 잎사귀들을 보고 '역시 세상은 재밌어.' 하고 생각하고는 다시 힘껏 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번에 옮겨낸 시 <삶을 즐길 시간>에도 삶을 천천히 음미하며 바라보는, 그런 여유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7연의 '세월의 재간에 헝클어진 삶'을 상상하며 그려봤습니다. 마구 헝클어진 삶을 무성한 풀밭으로 두어 두 사람이 그 속을 파고들도록 하였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스치는 풀밭의 한가운데입니다. 허리께까지 올라온 풀밭에서, 두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팔을 크게 휘젓고 지나간 자리는 온통 헤집어질 테죠. 그들은 헝클어진 그 쪽빛의 삶을 두 팔 가득 모아 품으로 끌어안으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3, 4연과 8연의 일부를 떠올리며 그렸습니다.
하늘에 어둠이 조금씩 내려오는 시간, 한 사람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걸터앉습니다. '떠난 이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지나갔을 자리에 혹여 그림자라도 남아있진 않을까 눈으로 따라 내려가겠죠. 그 길목을 보며 그들을 향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함께 떠나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의 시선을 따라 한없이 밀려나는 듯한 바다를 지켜보고 있자니 어느새 바다에는 빛이 사라지고 까만 파도가 울렁입니다.
작가소개
안나 드 노아이유 Anna de Noailles (1876~1933)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1901년 출간한 첫 시집 『헤아릴 수 없는 마음 Le cœur innombrable』 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시집 『사랑의 시들 Poèmes de l'amour』(1924)을 비롯 소설과 자서전을 남겼다. 공쿠르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상이 불발되자 여성 심사위원들로 구성된 페미나 문학상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프랑스어 문학을 드높인 공로로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수상하고 프랑스 내 최고의 명예로 꼽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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