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저녁
- 녹아내리는 프랑스 시: 시간결정
- 2021. 6. 18. 11:00
여름 저녁
옅은 우수가 표면에 길게 늘어진다
고단한 풀내음이 너를 향해 떠오르는 게 느껴져?
축축한 저녁 바람이 정원을 음울하게 해
물은 잔잔히 떨고 물결에 연못 표면이 얇게 조각나고
그 조각들은 완전히 겁을 먹은 것 같아
즙이 많은 줄기에서 비롯된 이상한 맛
네 손은 내 손을 세게 잡고, 그러면서도 너는 잘 느끼지
내 꿈의 고통과 네 꿈의 달콤함이
갑자기 우리를 서로의 외부인으로 만든다는 걸 말이야
무의식적이고 미약한 우리의 마음이란!...
나무들 속에서 노는 꽃잎들은 차가워
그들이 접히고 살랑거리는 걸 봐, 그림자는 자라나고
저 꽃들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향기를 지니고 있어...
슬픈 옛날은 내 영혼 속에서 일어나고
소중한 추억들은 유령처럼 네 주위를 맴돌지.
겨울이 더 나았어 내게는 말이야. 대체 왜,
봄은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야만 할까?
청춘이란, 참으로 순진하고 짧을 거야!...
우리가 바라는 모든 사랑은 손안에 잡히지 않고
늘 여정에서 만나는 여러 일들에 머물지
이리 와, 우리 안락한 방 캄캄한 고요 속으로 돌아가자
넌 봤지, 여름이 얼마나 매정하게 우리를 밀어내는지
그 방에서 우리 둘 다 작은 평화를 찾아낼 거야.
다만 여름 향기는 네 머리칼에 남고
내 영혼 속 하루의 번민은 계속될 테지
"슬픔을 덜 감각하기 위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원문 링크
https://www.poesie-francaise.fr/anna-de-noailles/poeme-soir-d-ete.php
다 은
민 주
사람들은 인조 잔디 위에서 즐거워 보였다. 1. 푹신한 듯 보여도 얼마 못 가 엉덩이가 배기는, 패브릭 의자가 빽빽한 실내 영화관이나 2. 정원이 있는 노천카페 주인이 창고에 있는 접이식 의자를 모두 꺼내 와서 꾸민 1층 야외극장도 이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3. 입장한 사람들에게 팔찌를 채워주고, 샴페인을 나눠주며, 비현실적인 날씨가 피부를 감싸고 구름이 일시적 차양이 되어주는 장소, 루프탑. 인조 잔디는 땅이 아니라는 증거로 깔려 있는 것인지, 그래서 사람들이 이리도 만족하는 것인지. 옥상 영화 상영회는 시작부터 사람들을 붕붕 뜨게 해주는 듯했다.
뉴스레터에서 이 상영회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살고 있는 동네에 만족하고 있지만 매일을 동네 안에서만 맴돌게 하는 여러 요소들을 무시하고 멀리 갈 이유가 필요했는데. 꽤 멀지만 지하철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책 한 권도 같이 앉을 자리만 잡으면 그만이었다. 티켓 값은 무료, 주제는 ‘프랑스 여성 감독의 여성 영화’, 같이 갈 친구들. 피곤함을 무릅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큰 스크린을 통해서 영화를 본지가 너무 오래됐기에 여행지에서의 순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매할 수 있었다.
첫날의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의 주인공인 네 모녀 중 막내딸이 여자도 일어나서 소변을 볼 수 있다며 옆집 꼬마에게 시범을 보이는 장면이 나왔다. 그러고는 질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갑자기, 쿵쾅쿵쾅. 푹신한 인조 잔디에서 분주하게 발을 움직이며, 몇몇 사람들이 나가버렸다. 남자 관객 몇 명이 나가니까, ‘그렇다면 저도… 헤헷.’이라는 눈빛을 보이면서 두 팀 정도가 중도 하차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게도 이 영화가 별 다섯 개는 아니지만… 현실보다 훨씬 순한 맛인 상황들을 저렇게 아름다운 프랑스 고택에서 그려준다는데, 중간에 나갈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여성기 이야기를 하니까 나가버린 관객들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다가 내가 영화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어느새 바뀌어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보통 다른 현실을 만나기 위해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예전에 봤던 영화 중에 로맨틱 코미디만 놓고 보자면, 지금은 역해서 다시 볼 수 없는 이야기도 있고 너무 유치하지만 화면이나 패션을 보고자 재관람하는 영화도 있다. 공포나 고어가 가미된 장르는 아예 못 보는 편이었다가 작년에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를 몇 시즌 보면서 결국 웃긴 현실을 다시 비웃기 위해 잔인해지는 이야기들에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지금은 영화를 볼수록 현실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계속해서 내가 알고 싶은 이야기와 나를 닮은 이야기, 그리고 나를 달래는 이야기를 찾게 된다. 영화와 영화인에 야유를 보내는 현실을 역시나 현실에 있는 내가 야유하기도 한다. 단순한 재미로 영화를 보는 날도 적지 않은데, 그럴 때면 ‘이런 포인트에 즐거운 나는 너무나도 빻았다?!’라는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그 재미가 내게 좋은 원동력이 되어서 잘 살면 그만이라고, 때로는 수동적인 관람자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여성기 얘기에 바로 나가버린 사람들이 이해되기도 한다. 그들이 상상한 주말에 클리토리스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친구는, 그냥 앉아있고 싶었다. 이렇게 공격적이지도 않고 깜찍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몇 년에 한 번 나올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나와서 더 다층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관객으로서 자리를 지키면서 친구와 ‘저건 좀 오반데…’, ‘나는 우리 엄마가 저러면 좋을 것 같은데.’ 등의 아주 소소한 피드백을 남겨서 영화에 대한 애정을 표시해야 했다.
["슬픔을 덜 감각하기 위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영화 대사 같은 이 멋진 말은 꾹꾹 눌러 담은 현실을 지내와서 담담하지만 더 잘 살아보고 싶은 여자들의 마음이 아닐지, 낭독하면서 생각했다.
그다음 날 상영된 영화는 (쓰면서도 박수가 절로 나오는) 아녜스 바르다의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였고 어제 본 영화는 멋진 두 명의 엠마가 나오는 <크루엘라>였다. 영화는 현실 같기도 꿈같기도 해서 나는 슬픔을 덜 감각할 수 있었다.
작가 소개
안나 드 노아이유 Anna de Noailles (1876~1933)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1901년 출간한 첫 시집 『헤아릴 수 없는 마음 Le cœur innombrable』 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시집 『사랑의 시들 Poèmes de l'amour』(1924)을 비롯 소설과 자서전을 남겼다. 공쿠르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상이 불발되자 여성 심사위원들로 구성된 페미나 문학상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프랑스어 문학을 드높인 공로로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수상하고 프랑스 내 최고의 명예로 꼽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