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오동통면의 시절

    이 글은 올 5월에 열렸던 오뚜기 제1회 푸드에세이 공모전에 투고했다 낙선된 작품을 다루고 있다. 푸드에세이 주제는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로, 자사 제품이 아닌 타사 제품에 관해 이야기해도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 나는 곧바로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는 사실 거짓말이다. 아무리 그랬다고 한들 타사 제품 이야기를 하는 글은 공모전에 뽑히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도 거짓말이다. 사실 나는 처음 그 공모전을 발견하자마자 오로지 이 생각에 점령당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이건 써야지.”라는 생각이었다.

    왜냐면 수자가 10년 넘게 일해온 곳이 오뚜기니까. 수자는 마트에서 일하며 가끔 행사를 맡고 교육을 하러 이른 새벽 집을 나섰었다. 그러므로 집으로 가져오는 제품들도 모두 오뚜기. 그런 환경 속에서 내가 오뚜기 식품에 대해 기쁘고 행복한 기억만 있을 리는 만무했다.

    글을 다 쓰고 나는 여자친구에게 글을 보여주었다. 이 말도 덧붙였다.

    “행복하거나 기쁜 이야기는 아닌데, 존나 잘 썼어.”

    여자친구는 글을 읽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다.

    “언니, 이건 절대 안 뽑혀.”

    단호한 목소리였다.

    “아니 왜? 내가 얼마나 오뚜기에 찐인데.”
    “그렇다기엔 농심이 나오잖아. 절대 안 된다에 한 표. 글은 잘 썼는데 이건 안 돼.”

    1등은 500만 원, 그리고 가장 낮은 상은 60명 대상으로 오뚜기 몰 5만 포인트를 지급하는 것이었는데, 솔직히 1등은 안 바랐어도 나는 내가 오뚜기 몰 5만 포인트를 받으리라 생각했고, 머릿속에서는 이미 장을 다 보고 결제까지 해서 배송을 기다리는 중이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 뒤 사람들과 이 이야기를 하며 까르르 웃었는데, 나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유머로 쓰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야깃거리는 당연히 “아니 안 떨어질 줄 알았는데 진짜 서운하다 서운해!” 같은 한탄들이었다.

    그런데,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원래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대해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이랄까?”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생각했다. 만일, 오뚜기가 아닌 스타벅스에서 이런 공모전이 열린다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또, 어떤 이야기들이 듣고 싶을까?

    먼저, 스타벅스로 인해 행복했던 이야기는 사실 별로 안 궁금했다. 나 또한 스타벅스 에세이를 쓰게 된다면, 사회생활에 찌든 내가 약물 대신 커피로 하루를 연명하고, 늦은 밤 작업을 위해 벤티 사이즈의 커피를 위장에 때려 박는 그런 이야기들을 썼을 것이다. 아니면 스타벅스와 관련되었던 논란거리에 대해 의견을 밝혔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을까? 라는 나의 상상 속에는 대상을 차지한 글의 제목이 큰 현수막과 간판으로 제작되어 전국 방방곡곡에 걸려 있었는데 그건 바로……

    경 <스타벅스 커피 마신다고 김치녀 된 썰.txt> 축 이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상상 속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니까, 어떤 것이든 그것과 관련하여 행복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매우 많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번 일을 통해서 한 가지 궁금증을 얻게 되었다.

    우리끼리도 잘 살아, <우잘살>은 부정과 긍정, 둘 중 어디에 가까울까?

    이 고민에 대한 답은 아마 에세이 원고 집필이 모두 끝난 뒤에야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나는 대답을 미래에 전송해놓고 천천히 나아가볼 예정이다.

    *

 

    제 1회 오뚜기 푸드에세이 공모전 응모작


제목 : 오동통면의 시절

    오뚜기에는 오동통면이라는 라면이 있다. 이름 그대로 면발이 오동통하고, 국물이 시원한 것이 장점인 라면이다. 비슷한 식품으로는 농심의 ‘너구리’가 있겠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옛날에 한참 듣던 노래를 시간 지나 들으면, 그때의 향수가 떠오르는 것처럼 나는 오동통면을 보면 어느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남주혁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거다. 나의 어느 시절을 대표했던 온도, 습도, 조명 같은 것들…….

    우리는 반지하에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파트 지상층에 살다가 반지하로 이사를 했다. 갑작스러운 경제 악화 때문이었고, 수중에 돈이 없어 좋은 환경으로 이사를 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깔끔하고 좋은 환경의 반지하 방은 많다. 다만 우리가 이사하게 된 반지하는 정말로 끔찍했다. 마트 옆에 붙어 있는 집이었다.

    창고로 썼던 듯 군데군데 먼지와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너덜거리는 창문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바람을 마음대로 바깥에서 안으로 옮겨 다녔다. 꼬리까지 더해 팔뚝 크기의 잿빛 쥐들이 매일 밤 음식물과 쓰레기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갉아먹었으며, 잠을 자다 얼굴에 드는 이물감에 눈을 떠 보면 공격적인 자세로 꼽등이가 콧등에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 날은 수자가 커다란 박스 하나를 힘겹게 들고 귀가하였다. 수자는 오동통면 한 박스를 싸게 사 왔다면서, 가스레인지 아래 서랍에 그것을 두고 배고플 때 먹으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나는 열다섯, 윤희는 아홉 살이었다. 나는 철이 없었고, 윤희는 철이 들면 안 될 나이였으므로 우리는 박스 안에 가득한 라면을 보고 환호하였다. 그즈음 우리는 매일 3분 카레나 곰국을 주야장천 먹어 왔었는데, 주식으로 매일 먹던 카레와 곰국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자매는 한껏 들떠 있었다. 게다가 밥보단 빵, 빵보단 라면을 조아하는 어린 세대에게 라면은 맛도 있고 조리도 간편한 그야말로 ‘좋은’ 식사로 여겨졌었다.

    좋아하는 우리 자매와는 다르게 수자의 표정은 어두웠다. 카레와 곰국보다 이게 훨씬 더 좋아. 내가 말하면 수자는 다행이네, 라고 말하면서 애써 우리에게서 등을 돌려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 명 겨우 누울 수 있을만한 좁은 화장실에서는 끼익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는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그 소리가 수자의 울음소리였다는 건 나중이 되어서야 알았다.

    처음과 달리 우리는 점점 시들어갔다. 라면이 간식이 아닌 주식이 되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조금 지겹고 조금 싫증이 났다. 라면 그만 먹고 싶어, 라고 말하면서도 라면을 끊지 못했던 이유는 라면이 너무 많이 남은 까닭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박스를 비울만큼 열심히 라면 물을 끓였지만 라면은 꺼내도 꺼내도 쌓여 있었다. 수자는 한 번도 우리와 라면을 함께 먹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다 먹은 라면 국물에 어디선가 가져온 찬밥을 풀어 숟가락으로 퍼먹을 뿐이었다.

    박스 안에 남은 마지막 라면 봉지를 끓여 먹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저녁 나는 친구를 만나러 집을 나서던 중이었고, 집 근처 놀이터에서 누군가와 전화하던 수자를 발견했다. 저녁에 나간다고 하면 혼이 날까 봐, 나는 수자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조용히 곁을 지나가던 참이었다. 그때, 수자가 울음을 터트렸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드냐고,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도 고작 300원이 나와 점심을 먹는 대신 300원으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에 하고 있다고, 집에 와서 애들이 먹은 라면 쓰레기와 냄비를 보면, 삶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진다고.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며 울던 수자를 뒤로하고 걸을 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그래서 더욱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소매로 얼굴을 벅벅 닦으며 수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길을 내달렸다. 숨이 차올랐다. 먹은 라면 때문에 결국 나는 그날 완전히 체해버렸고, 수자는 그 이후로 한 번도 집에 오동통면을 가져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이따금 이런 말을 하며 장난친다. “오동통면 진짜 쳐다보기도 싫어. 너구리로 갈아탐.” 이런 말을 하면 듣던 윤희가 “맞아. 그때 라면 엄청 많았어. 무슨 맛인지 아직도 기억나.”라고 맞장구쳤고, 수자는 “그랬니? 나는 안 먹어서 모르겠다. 그때 진짜 속상했는데.”라며 함께 웃었다.

    나는 아직도 오동통면을 먹지 않는다. 윤희도 그럴 것이다. 가끔 장을 보러 마트나 편의점에 갈 때, 오동통면을 보면 “저거 봐, 우리가 실컷 먹었던 거다.”말하며 까르르 웃는 것이 전부다. 이른바 오동통면의 시절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우리 자매와 수자에게 그 시절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시절이 되었으나, 그렇기에 지금이 더 빛나고 가능성 있는 시절이 된다는 것 또한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꽤 안정적으로 산다. 엄청나게 좋은 집은 아니지만, 각자의 생활 패턴에 맞게 꾸린 방을 갖고 있으며 잿빛 쥐와 꼽등이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 매일 햇볕이 따스하게 쏟아지는 아침을 맞이할 수도 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이 되어버린 이랑도 있다. 이랑도, 나도, 윤희도, 수자도 더는 배고프지 않기에 우리는 속상할 일도 없다. 기호를 따질 수 없던 시절, 이제는 기호에 맞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

    “그렇게 힘든데 어떻게 버텼어?”

    “몰라. 그건 기억도 안 나.”

    “내가 노스페이스 패딩 사달라고 시위할 때, 그때 진짜 어처구니없었겠다.”

    “나도 진짜 어이가 없네. 아니, 안 사준다고 한겨울에 조끼 하나만 입고 다니는 미친년이 어디 있니?”

    “여기 있지. 지금 생각하면 진짜 웃기네. 쏘리.”

    “암튼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운 날이 안 운 날보다 더 많았다니까?”

    “나는 그래서 엄마 같은 거 안 하려고.”

    “그래. 너는 나처럼 되지 말아라.”

    “그러려고. 그렇게 나 하는 일 잘 되면 프랑스 여행이나 다니자.”

    “엄마는 서울이 좋은데.”

    *

    안녕. 우린 그때의 가난에 안녕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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