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우울한 날에 데려와버린 형광스파트

 

    지난 화에서 함께 사는 반려동물을 물화하고 귀여워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표한 바 있다. 글을 쓰며 몇 명의 사람들이 유독 생각났다. 그중 한 명은 특히나, ‘고양이는 나에게 위안이 된다’며 내게 수줍어하면서 털어놓은 적 있었다. 위안이라니. 밥을 챙기는 것도 화장실을 치우는 것도 게을리하면서 감히 동물에게 위안을 받으려 하다니. 끔찍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딱히 그런 사람들에 대한 내 의견은 변동 없다. 다만, 그들에게 반성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별개로, 내가 그들과 크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인외식구를 쓰며 몇 회차를 거쳐 말해온 것처럼, 나 또한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며, 단지 최대한 덜 유해해지고 싶어서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사실 터놓고 말하자면 나는 ‘존중’이나 ‘배려’와는 거리가 먼, 굉장히 유해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존재를 괴롭혀왔다. 동물이나 식물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감정에 못 이겨 친구들을 못살게 군 적도 여러 차례였고, 대뜸 그만두겠다고 고집을 부려 직장 내 사람들을 곤란하게 한 적도 있고, 가족에게 심한 말을 하며 상처를 준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정말 그 친구들이, 가족들이, 직장 사람들이 미웠다. 내 심정을 헤아려주지 않음에 속상하고 억울했다. 누군가 싫어진다는 건, 그의 역치에 비해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나의 노력을 인정하고 감사함을 느끼길, 나아가 나라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의무가 당연히 없고, 내 기대를 채워주지 않는 게 딱히 죄도 아니었다. 타인과 상관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될 일인데, 타인의 반응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난 모든 일을 멈추어야 했고 의욕이 바닥나고는 했다.

    최근에도 난 같은 맥락으로 자주 힘이 빠지고 의욕을 잃었다. 나는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하는데도 감사하단 말 한마디, 고생한다는 위로 한마디 듣지 못했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열심히 하지 않아도 금세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전부터 우울해질 때마다 물욕이 올라오고는 했고, 아직 그 버릇은 여전하다. 요즘에 꽂힌 물욕의 대상은 역시 식물이었다. 기분이 가라앉거나, 무언가로부터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식물을 파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구경을 했다. 당근마켓을 뒤지다가 충동적으로 (내 주머니 사정에 비해) 비싼 유묘를 구입하기도 했다.

    형광스파트를 들인 날도, 그런 날이었다. 생리 주기가 다가와 호르몬이 장난을 치고 있었고, 모든 일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우울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식물을 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잔액은 십만 얼마였다. 그 돈으로 20일 넘게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다. 식물을 사면 그를 관리할 흙이나 영양제도 더 사야 하는데, 그러면 난 다음 달까지 남은 날들을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그러면 기분은 더욱 안 좋아질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난 스스로 고집을 부렸다. 식물을 사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말이다. 내 주변의 인간들이 내게 주지 않는 위안을 식물은 분명 선사해줄 거라고. 그래, 마치 고양이에게 위안을 받는다고 수줍게 털어놓던 그 사람처럼. 다른 존재를 돌볼 역량이 부족하면서도 욕심을 부렸다.
    고양에 있는 화원 단지에 가려다, 멀리 나갈 만큼의 의지도 부족하여 주변에 있는 아무 꽃집을 찾았다. 건물 주차장 옆에 협소하게 붙어있는 꽃집이었다. 주로 절화와 꽃다발이 진열되어 있었고 관엽 식물은 몇 개 없었다. 그중에서 하필, 형광스파트필름이 내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유튜브에서 한번 본 이후로 ‘음, 예쁘네!’ 정도의 감상만 갖고 있던 터였다.


    “이거 형광스파트필름 맞나요?”
    “그거 스파트필름 아닌데.”

    처음 가보는 꽃집이었는데, 직원분이 유독 퉁명스럽고 살살 반말로 응대를 하셨다. 괜히 오기가 생겨서 화분을 들고 살펴보았다. ‘형광스파트’라고 적힌 이름표가 꽂혀있었다.

    “여기 형광스파트라고 되어있는데요?”
    “아. 그건 맞는데 옆에 건 아냐. 살 거예요?”

    옆에 건 아니긴. 분명 내가 들고 있는 것과 옆 화분 모두 형광스파트필름이었다. 직원은 내가 들고 있는 화분이 이만 육천 원이라고 했다. 화원에 가면 같은 사이즈를 더 싸게 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직원이 ‘다 도자기 화분 값’이라며 이 가격이 매우 타당하다는 걸 강조했다.
    그때 지갑을 열지 않는 게 현명했을 수도 있다. 원래 계획은 몇 천 원 짜리 작은 포트를 사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 매우 예민했고, 직원의 무례함 앞에 기가 죽은 것처럼 보이기 싫었고, 형광스파트필름은 평소에 예쁘다고 생각했으므로. 덜컥 카드를 내밀어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형광스파트를 식탁에 내려놓고, 엎드린 채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연둣빛이 고왔다. 참 고왔지만, 내 기분은 여전히 가라앉아있었다. 식물을 사면 모든 우울함이 녹아버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미운 사람들이 미웠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자꾸만 떠올라 괴로웠다. 달라지지 않음을 깨닫자, 우습게도 형광스파트가 원망스러웠다. ‘이만 오천 원이나 주고 샀는데…….’ ‘사면 기분 좋을 줄 알았는데, 돈만 버리고 말았잖아…….’ 하고 말이다.

    나는 이런 식의 건강하지 않은 루트를 반복해왔다. 기대와 실망, 그로 인한 우울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고 그를 원망하는 루트. 상대는 친구나 동료일 때도 있었고 식물 혹은 동물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상대에게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도 나고, 우울을 끌어올린 것도 나였다. 감정의 출처가 ‘나’로 밝혀지면, 상대를 원망하는 짓은 일단 멈출 수 있게 된다.

    그날, 형광스파트필름을 구매한 날도 우울의 이유를 찾다 찾다 결국 ‘나’로 돌아왔다. 당연히 죄 없는 식물을 원망할 일이 아니었다. 형광스파트필름은 그냥 그 시각 그 꽃집에서 단가 높은 도자기 화분에 식재되어 귀여운 연두색 잎을 뽐내고 있었던 것뿐이니.
    우울한 날에 데려와버린 형광스파트필름은, 따스해지는 기온을 타고 크고 작은 새잎을 쭉쭉 뿜어주고 있다. 함께 사는 식물이 위로가 될 때도 있지만, 위로되지 않는다고 해서 식물을 야속해 하는 바보 같은 짓은 이제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되도록 정신력이 약해져 있을 때는 식물 소비를 자제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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