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_내가 죽기로 했던 날들

 

    하나님, 전 내년 서른이 되는 생일에 죽을 거예요. 하지만 남은 1년 동안 제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저에게 생긴다면 죽지 않고 소원도 안 빌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스물아홉 살 생일에 내가 마지막으로 간절히 기도했던 반 협박성 기도 내용이다. 교회는 다니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서른 살 생일까지 남은 1년 동안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보기로 했다. 후회 없이 잘 죽을 수 있게.

    나는 왜 죽고 싶을까. 내가 꿈꾸는 죽음, 만족스러운 죽음을 위해 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내가 가장 죽고 싶었던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외로움을 견디는 게 너무 지루했다. 아마도 나는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던 건지 늘 사람이 그리웠지만, 사교성이 없고 소극적이어서 친구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래. 그게 맞을 것이다(내가 괴팍해서가 아니라). 그래서 내가 후회 없이 죽기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해야 하는 건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수십 명이 모이는 일러스트레이터 그룹 정모에 참여했다. 우황청심환을 먹고 자존심과 자존감, 잡생각도 지우고 떨리는 마음으로 모임 장소에 들어섰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가득했고 시끌벅적한 곳에서 비어있는 구석 자리를 발견하고 거기에 앉았다. 또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옆자리, 앞자리 사람이 바뀌며 나더러 왜 이렇게 말이 없냐고 한마디씩 했다. 나는 그냥 웃었다. 웃는 건 자신 있다. 잘 마시지 못하는 술도 많이 마셨다. 조용한 나를 보며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내게 다가와 맨스플레인에 열 올리는 남자도 있었고, 예쁜 미소로 내게 말을 걸어주는 친구도 있었다. 조금씩 분위기에 적응이 되면서 간간이 대화도 나눴고 2차, 3차 술자리까지 간 끝에 그날 알게 된 모두에게 연락처를 알려줬다. 그 후로 크고 작은 모임에 자주 참석했고 휴대폰 주소록이 조금 길어졌다. 당시 난 홍대 쪽에 살고 있어서 모두에게 “홍대 오면 연락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내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누구든 연락이 오면 무조건 만나러 나갔다. 집 앞 놀이터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난 밝고 천진한 사람을 연기했다. 스스로 연기라고 생각했지만 아마 숨겨진 내 모습 중 하나였을 테고 나도 새로운 나 자신이 꽤 만족스럽고 신기했다. 조금 욕심이 생겨서,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깊이 기억되고 싶었다. 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러기 위해 내가 집어든 것은 향수였다. 나는 늘 진한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
    어느 날인가 옆을 지나가는 사람의 향기를 맡고 어릴 적 문방구에서 산 싸구려 고무 향수가 떠오르며 그리움이 느껴졌다. 오래된 분 냄새를 맡으면 할머니가 떠오르고, 어떤 향기에는 옥탑방 시절의 여름이 떠오르고, 또 어떤 향기에는 날 괴롭혔던 친구가 생각났다. 나도 그렇게 그들에게 기억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종 향수 냄새가 지독하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그런 말을 들어도 마땅할 정도로 매일 일부러 같은 향수를 진하게 뿌렸다. 지금 그 향기를 맡으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 친구들은 과연 날 기억할까.

    하고 싶었던 것을 다 해보려고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기타도 배웠다. 나는 언제나 부끄럼쟁이였는데 그때는 기타를 들고 다니며 친구들 앞에서 노래하고 기타를 쳤다. 고향에 갈 때도 기타를 들고 가 친구들과 부산 광안리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심지어 동영상을 찍어서 블로그에 올리기까지 했다. 난 노래를 잘 못 부르고 기타도 고작 4개월 정도 배웠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하루는 새벽에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기타를 치며 놀고 있는데 한쪽에 휠체어를 탄 무리가 있었다. 그들 중 한 분이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더니 기타를 들고 연주하는 사람은 나인데 왜인지 옆에 있던 남자인 친구에게 연주 하나 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가 요청한 곡은 김광석의 ‘일어나’.
    난 악보가 없어서 못 친다며 거절했다. 미안한 마음과 씁쓸한 마음이 함께 들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짧은 1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사건들이 있었으며 수많은 감정을 거침없이 감당했었다. 참 분주했고 쉴 틈이 없었다. 그때 만난 모두를 스쳐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지만 난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서른 살 생일이 가까워올 때 죽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원래라면 오필리아처럼 아름답게 죽고 싶었는데 문득 내가 죽은 걸 아무도 모르게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내 죽음을 슬퍼했으면 하는 마음이, 어느 순간 그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 일본에 살던 L이 귀국을 했다. 친구의 친구였던 L을 그렇게 만나게 됐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사랑의 감정을 느낀 건 아니지만 우리는 특별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L은 분명 날 좋아해줄 것 같았다. 아마 바로 그 시기에 L을 만나지 않았다면, 좀 더 빨랐거나 늦었다면 나와 L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만나게 되었고,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내 기도가 이루어졌다.

    죽기로 한 그해 난 인생의 밑바닥을 찍어 보자는 마음으로 꽤 방탕하게 살기도 했다. 괴로운 기억도 많아서 지금 생각하면 나 자신을 학대한 시기라는 생각도 들지만, 결과적으로 의미 있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거나 과장스럽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한 이야기지만 당시의 나를 꼭 안아주고 싶은 누군가도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내 소원은 기적처럼 이뤄진 게 아니라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뤘다. 그래서 난 노력을 믿는다(물론 자주 좌절하기도 하지만).
     기적은 엄청난 행운 같은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모든 일을 뜻하는 게 아닐까?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뻔한 말이 나는 꽤 와 닿는다. 우리는 매일 노력하고 있고 매일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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