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바로 지금, 여인초의 잎


    그러지 말자고 아무리 다짐해도 못 끊는 것이 있다면 ‘다른 집 식물 부러워하기’이다. 내 실내 정원의 식구들은 작다. 화분 두 개로 나눠 심은 싱고니움도 다른 집보다 유독 잎이 조그맣고, 커지면 토끼 귀 같은 잎을 내준다던 캄포스포토아넘도 어찌 된 영문인지 자랄수록 내놓는 새순이 작아졌다.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들의 큼직하고 시원시원한 대품 식구들을 보며 ‘앞으론 그냥 처음부터 다 큰 애를 살까?’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심 ‘그렇게 작았던 애가 이렇게 커졌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이상한 욕망도 있었다.
    우리집 작은 식구들을 괜히 얄궂어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우리집에도 커다란 친구가 있었다는 걸! 그 친구의 이름은 여인초. 여인초의 키는 나보다 조금 작고 잎은 내 얼굴보다 크다.
    여인초는 인외식구 3화에서 다룬 율마와 같은 날에 당근마켓 거래를 통해 들여온 식물이다. 처음에 만났을 땐 농장에서 출고된 그대로, 축축한 흙이 담긴 흰색 연질분에 식재되어있었다.
    지금은 식물의 잎이 조금 찢어지거나 끝이 갈색으로 변하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파리에 작은 상처라도 발견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는 했다. 그림처럼 매끈한 녹색 잎만 좋은 잎인 줄 알았다.
     그랬던 나에게 여인초와의 만남은 의외의 복병이었다. 여인초처럼 큰 잎이 펴지면서 자라는 식물은 원래 잎에 상처가 나기 쉬운데, 난 그걸 못 견뎠다. 가져올 때부터 잎의 가장자리가 두 군데 찢어져 있었는데, 거래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속이 상했다. 건강하지 않은 식물을 팔다니 너무하다고 판매자 원망도 조금 했다.
    이런 마음가짐을 바꾸게 해준 블로그 글이 있었다. 여인초 기르는 법을 소개하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여인초 잎은 원래 잘 찢어지거나 끝이 잘 마른다고 이야기하면서, ‘식물이 자라다 보면 생기는 자연스러운 찢어짐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건 좋지 않다’고 언급하고 있었다. 잎의 상처마저 그 식물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글이었다.
그 블로그 글을 본 후로는 여인초의 찢어진 부분을 봐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같은 여인초여도 이 부분이 이렇게 찢어진 건 우리 집 여인초밖에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흔둥이’ 대표 주자 여인초도 특별해 보였다.
    이 여인초는 시간이 흐를수록 특별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잎을 좋아하게 되면서 다양한 색의 식물이 많아졌는데, 어째 그럴수록 그 사이에 우뚝 선 여인초의 짙은 녹색 잎이 더욱 돋보였다. 휘황찬란한 색은 없어도, 식물 생활에 입문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큰 말썽도 없이 묵묵히 집 한 편에 머물러 준 식구였다.

    사실 이렇게 정이 깊게 든 이유는 여인초에게 자주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밥 먹는 시간보다 상처를 돌아보는 시간이 더 길었던 시기가 있었다. 1월이었다. 연초여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신년 계획과 관련된 콘텐츠를 내놓았지만, 미래를 상상하기엔 과거가 너무 커다랬다. 난 여전히 이불 속에서 추위를 피하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활기차게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에 1월 24일, 아주 천천히 줄기에서 기어 나오던 여인초의 새순이 펴져서 잎맥을 보여주었다. 여인초도 신년을 맞이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빼꼼 내민 새잎이 너무 귀여워서 사진을 찍고 보고 또 보다 보니, 1월 내내 날 괴롭혔던 근심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정말 ‘녹았다’고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비슷한 순간이 또 있었다. 이번에도 여인초의 잎 덕분이었다.
    기온이 점점 떨어지길래 베란다에 있던 식물들과 선반을 거실로 옮겼다. 연초보다 화분 개수가 늘어나서 옮기고 자리를 정하는 데 애를 꽤 먹었다. 특히 여인초의 위치가 애매했다. 키가 커서 선반 위에 올려놓지 못하니 일단 바닥에 두었다. 큰 식물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 막상 집에 있는 여인초 자리도 못 정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어영부영 식물 자리를 정하고 가만히 실내 정원을 바라보는데, 이 집에서 보냈던 1월이 떠올랐다. 식물 식구가 이렇게나 많아지고 날씨가 추워지는 동안 어떤 일을 하며 지냈나 되돌아봤다. 내가 썼던 글들과 지나쳤던 관계들을 꼽아보는데, 별안간 허무함이 사무쳤다. 어쨌든 여기서 일 년 가까이 지냈는데, 연초에 기대했던 것들을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 것 같았다.
    기분을 전환하려고 분무기를 들었다. 공중 분무는 습도를 올리는 데 도움이 그다지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난 자주 해주는 편이다. 잎이 끈적거리거나 먼지가 많으면 씻어 내는 느낌으로 해줄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분무를 자주 하는 이유는 재밌어서다. 남이 들으면 웃겠지만, 물을 주거나 분갈이를 할 때보다 분무기로 물을 칙칙 뿌릴 때 가장 ‘가드닝’을 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을 때에도 식물에 물을 뿌리고는 했다.
    그날은 유독 본격적이고 싶었다. 분무기 가득 물을 채우고 물수건까지 챙겼다. 모든 식물에 듬뿍 분무했더니 바닥에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잎이 물에 닿는 걸 싫어하는 식물 몇 개 빼고는 다 물을 뿌렸다.
    여인초가 마지막 순서였다. 물수건은 여인초를 위해서 챙긴 것이었다. 그 넓은 잎 하나하나에 물을 뿌리다 보니, 분무기를 쥔 손이 아려왔다. 물수건으로 잎 앞면을 훑었더니, 하얀 수건이 노래졌다. 몇 개월 동안 닦아주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노랗게 물든 수건을 빨아서 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시 실내 정원을 살피는데, 깨끗해진 여인초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매끈거리고 반짝거리는 잎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울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울게 되었다. 아까 널어두었던 수건을 급하게 집어 와서 눈물을 닦았다. 닦으면서 집에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 원 참 주책이야, 나 너무 주책이야, 세상에.’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여인초는 현재를 살아갈 줄 아는 식구였다. 과거에 머물러 있을 때마다 그의 넓고 짙은 잎이 날 현재로 끌어당기곤 했다. 잎이 찢어졌어도, 말라서 갈색이 된 부분이 생겨도, 살아 있기만 하다면 새잎을 뻗어내는 힘. 그런 힘을 내게 주었다. 이제는 지나간 상처보다, 바로 지금 내게 반짝거리는 순간을 선물하는 여인초가 훨씬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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