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시월에 떠올린 유월이


    10월의 끝물에 어쩐지 자꾸만 유월이가 떠올랐다. 유월이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엄마의 미용실에 놀러 가면 만날 수 있는 강아지였다. 미용실 옆 꽃가게 아저씨는 뒷마당에 유월이를 묶어놓고 길렀는데, 6월에 그 집의 일원이 되어서 이름이 유월이라고 했다.
    그는 순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몸집이 작은 강아지였다. 다가가면 피하지도 않았다. 그전까지 난 동물에 관심이 없었다. 사람도 아닌데 덩치는 벌레나 식물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크고 움직임도 활발하고 큰 소리도 내니까, 사실 무섭기만 했다.
    반면 유월이는 당시에 만나봤던 동물 중에 가장 얌전했다. 크게 짖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유월이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짖거나 낑낑거렸던 적이 있기는 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큰 소리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겁먹지 않고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얌전하고 작은 유월이는 쓰다듬으면 쓰다듬는 대로, 껴안으면 껴안는 대로 가만히 받아주었다. 보고 있으면 왠지 웃음이 나고 자꾸만 만지고 싶었다. 우리가 기르는 강아지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자주 놀며 정이 들었다. 나에게 유월이와의 만남은 인간이 아닌 생명체에게도 정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유월이는 일 년 정도 그 자리에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미용실로 놀러 가도 유월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연유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도망갔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산책 중 잃어버렸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얼마 안 가, 유월이가 꿈에 나왔다. 유월이가 나타나서 사람의 말을 하며 ‘아파’ 하고 울부짖었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유월이가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죽었다는 확신이 들자 뱃속에서 어떤 것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일어나서 눈을 비볐더니 눈물이 닦였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처음 맛본 순간이었다.
    유월이가 죽은 마당에(사실상 꿈에 나온 것뿐이지만, 죽은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학교에 가려니 고역이었다. 꾸역꾸역 등교를 했는데, 운동장과 교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전부 보통 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평소와 같은 하루를 시작해야 했지만, 그러기 싫었다. 내 소중한 인연 하나가 사라져 버렸는데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 현실에 녹아들기 싫었다.
    워낙 어렸을 때라 그날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거의 잊었는데,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울고 말았다는 기억은 선명하다. 몇몇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강아지가 죽었는데, 그 강아지가 오늘 꿈에 나와서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서 그렇다고 했다. 아이들은 대부분 날 위로해주었다. 위로를 받으니 마음은 안심이 되었는데 눈물은 오히려 더 솟구쳤다. 친구가 갖다 준 휴지로 콧물을 닦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떤 아이가 이렇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쟤 강아지 안 기르지 않아?”
    직접 물어봤다면 대답이라도 했을 텐데, 당사자의 답변은 필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시기의 아이들은 이목을 끄는 친구를 유독 싫어했다. 내가 관심을 받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아이의 말대로 내가 강아지와 살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난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서가 아니라, ‘유월이’가 죽어서 슬펐을 뿐이었다. 유월이는 언제나 살아 움직이던 존재였고, 당연히 살아 있었던 존재의 죽음은 오롯이 받아들이기엔 버겁기만 했다.
    2021년인 지금 유월이의 죽음이란 15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이다. 그런데 10월에서 11월로 넘어갈 때쯤, 뜬금없이 유월이를 회상하는 일이 잦아졌다. 일정을 체크 하는 중에, 샤워를 하면서, 책 정리를 하다가, 문득문득 유월이가 떠올랐다. 떠올랐 다기보다는 찾아왔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유월이는 문을 두드리듯 내 의식에 노크를 하며 자꾸만 기척을 남겼다. 예전처럼 짖지도 않고 얌전하게 가만히, 사람인 나를 올려다보며 가만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월이가 찾아온 김에 그에 대한 글을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유월이는 너무 먼 기억이어서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 뚜렷하게 정할 수 없었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유월이에 대한 인상과 기억을 메모만 해두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11월 2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에게 연락이 왔고, 나는 스트레칭을 막 끝낸 참이었다. 엄마는 회사에 이야기하고 대구로 오라고 했다. 할머니는 대구의료원에서 숨을 거두셨다. 대구의료원은 대구의 전염병 전담 병원이다. 대구에서 코 로나에 감염되면 대구의료원으로 간다. 할머니가 코로나에 감염된 건 10월 말의 일이었다. 내가 그 소식을 들은 지 2주도 되지 않은 시점에 돌아가셨다.
    재택근무 중이었어서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회사에 언급을 먼저 하는 게 순서 였겠지만, 당시에는 혼이 나가 있었다.) 세수를 하고 까만 폴라티와 까만 바지, 까만 레자 코트를 입었다. 옷을 고르며 생각했다. ‘다음 주에 있을 내 상견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상복을 입어야 하나? 입기 싫다.’
    서울역으로 가는데, 심정을 정의하기가 어려워서 곤란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기도 하고 귀찮은 것 같기도 하고 화도 좀 나고 불편한 것 같기도 한 한편 무기력한 것 같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 내가 인스타그램에 남겼던 글의 전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지난주 코로나 확진 소식을 들었고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다고 엄마에게 전달받았다. 인스타그램에 써도 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는데 타자를 치지 않으면 머리가 복잡해질 것 같아서 일단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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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간 대구에 놀러 갈 생각이었다. 대구는 내가 사랑하는 도시니까. 그런데 장례식 때문에 갈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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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를 사랑한 적 없는 것 같다. 할머니는 나에게 반가운 가족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라는 이미지만 강했다. 나한텐 관심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고 친하지도 않은 데다가 내 성격이 차갑다며 엄마를 통해 핀잔만 주었다. 엄마를 괴롭히는 아빠의 엄마. 나랑 안 친한 나이 많은 여자.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할머니를 어려워했던 만큼 할머니도 날 어려워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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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에, 할머니가 원망스러운 만큼 그에게 나의 버젓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번듯한 신랑과 직장을 자랑하며 그래, 잘 살아라, 행복해라, 그런 덕담을 듣고 말리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관심 없이도 난 잘 살아남고 있다고 내세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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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는 상견례가 잡혀 있었다. 할머니는 왜 하필 나의 상견례를 앞두고 돌아가신 걸까. 할머니는 한 번도 인정의 얼굴을 본 적 없다. 다른 친척들도 마찬가지다. 손주사위 첫인사를 장례식장에서 하게 하다니 끝까지 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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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와 나의 관계는 이렇게 끝이 났다. 서로 어려워하기만 하다가. 서로에게 득도 실도 딱히 주고받은 것 없는 채로. 할머니는 정말로 날 어떻게 생각했을까. 예뻐해 주기엔 애매한 손녀였을까, 의외로 날 많이 사랑했을까. 그의 진심은 뭐였을까. 그 마음을 알 도리가 없어서 갑갑하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출발 시간까지는 40여 분이 남아있었다. 스타벅스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앉아 있는데, 문득 주위의 소음과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모조리 낯설어졌다. 내가 처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공기가, 분위기가 냉정하게 느껴졌다. 마치 공간에서 밀려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 감각이 처음 느껴보는 게 아니란 걸 이내 깨달았다. 15년도 더 전, 초등학교 교실. 아이들이 몰리든 말든 엉엉 울다가, 관심받고 싶어 한다는 뉘앙스의 비아냥을 들어도 쉽게 눈물이 멎지 않았던 그날. 스타벅스가 순식간에 예전 그 교실로 탈바꿈되는 착각이 들었다.
    관심을 받고 싶었던 건, 그 아이의 오해가 아니라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아무도 그 죽음을 몰라주는 건지, 그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나의 처지를 알아주지 않는 건지, 야속했다. 알아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울음을 터트린 건 맞으니, 관심을 갈구하는 것으로 보였어도 할 말이 없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다. 트위터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누구라도 좋으니 ‘마음(하트)’을 남겨 달라고 올렸다.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이 트윗에 반응을 남겨주었고 연속으로 뜨는 알림 배지를 보며 공간에서 밀려나는 감각을 조금 떨쳐낼 수 있었다.
    몇몇 분은 직접 답글을 달아주시기도 했다. 맨 처음 달린 답글을 읽고는 갑자기,
    예정에는 없던 눈물을 흘렸다. 이 지점 역시, 반 친구들의 위로에 오히려 더 크게 울고 말았던 옛날과 비슷했다.
    유월이가 죽었을 때 이와 다른 게 있었다면, 스스로의 눈물을 납득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잔류해야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이 타당할 것 같은데, 그전까지 할머니에게 사랑이랄 것을 보여드린 적이 없었다. 좋아하냐 미워하냐를 따지면, 솔직히 미웠던 적이 더 많았다. 전화도 먼저 걸어본 적 없고, 할머니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한 적도 있었다. 가끔 날 향해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난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저도 사랑해요, 하고 ‘거짓말’했다.
    그런 과거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내 눈물을 보고 가식적이라 여기지는 않을까. 아니면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나의 우는 모습을 통해 할머니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을 거라고 오해를 하면 어쩌나. 스타벅스에 앉아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 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 돌아가셔서 좀 울었다고 별 걱정을 했다 싶지만, 그때는 그랬다.
    아주 좋아했지만 키우는 강아지는 아니었던 유월이의 죽음과, 제대로 된 애정을 주고받진 않았지만 어쨌든 내 아빠의 어머니였던 할머니의 죽음. 두 가지 모두 마음껏 애도하기엔 ‘내가 뭔데?’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난 두 죽음 모두를 향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얼마나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나와 가까운 사이였든지 간에, 죽음이란 결코 단조롭게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잘 알고 지냈던 그이가 이제 숨을 쉬지 않는다는데, 그걸 되돌릴 수도 없다는데. 어떻게 덤덤할 수 있을까. 누가 그럴 수 있을까.
    시월에 유월이를 떠올렸고, 십일월에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유월이가 자꾸만 내 의식에 노크를 했던 건, 그토록 버거운 ‘죽음’을 잘 받아들이도록 준비를 하게 해준 것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 글을 장례식에 다녀온 십일월에 쓰기 시작하여 십이월까지 붙잡았고, 이제야 마지막 문단을 쓰고 있다. 쓰면서도 몇 번이나 코끝에 열이 올랐다. 이 글을 끝내면 이제 그 죽은 존재들을 완전히 놓아주어야 할 것 같아 쉽게 마치지 못하고 있었음을 인정한다. 이제 한 문장만 더 쓰고 글을 끝내려 한다. 정말로 그들을 보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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