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어떤 해후

   비에 젖은 공원의 나무들은 햇볕을 받고 한결 싱그러워졌다. 조끼와 모자를 벗고 재킷에 크로스백을 맨 남자는 자주 웃었다. 그는 카페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젊어보였으며 목소리도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는 내게 이름을 물었다. 조이스라고 대답하자 남자는 좋은 이름이라며 시를 읊듯 내 이름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내가 그를 힐끗 쳐다보자 남자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금세 그의 귀와 볼이 빨개졌다. 남자는 내가 안드로이드이며 조이의 섹스봇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부러 그를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 혹시 음악을 하시나요?

    - 그냥 혼자 흥얼거리며 노래를 만들어 부르곤 해요.

    원두를 사러갈 때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묻던 남자의 질문에 나는 성의껏 대답했을 뿐이었다. 나를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싱어송 라이터의 매력적인 여성으로 만든 것은 그의 기대와 호기심이었다.

    그의 눈빛 속에 있는 나는 늘 근사했다. 그 근사하고 매력적인 모습에 빠져든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나는 낯설고 새로운 내 모습에 점점 취해갔다. 누군가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지만 한 사람에게 복종하고 충성하는 노예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알고 있었다. 한 번쯤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위로하며 나와 그를 모두 속였다. 하지만 내내 머릿속에서는 조이가 떠나지 않았다. 나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 괜스레 길에 놓인 자갈을 발로 툭툭 차며 걸었다.

    - 옛날에 사랑했던 이도 걸을 때 그렇게 툭툭 땅을 치면서 걸었어요. 당신을 보면 왜 그런지 그 애인이 떠올라요. 얼굴이나 말투는 다른데 이상하게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꼭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남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눈빛이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내게 그 눈빛은 어리석게 여겨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했던 누군가와 불화했던 지점을 망각한 채 자신이 길들여진 상대의 외모와 행동, 말의 패턴만을 몸과 마음에 새긴다. 외모든 성격이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사람의 특성들을 선호한다. 조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봇을 선택하는 기준을 봐도 알 수 있다. 이 남자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누군가의 대리 역할을 해야 하는 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리 불쾌할 일도 아니었다. 섹스봇의 소명이란 어차피 그런 것이니까…… 그리고 자신의 한계와 패턴에서 벗어난 혁명적인 연애를 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며 혹여 운명 같은 새로운 만남이 이뤄진다 해도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무의식이 만들어낸 필연일 확률이 많다는 것을 이미 조사를 통해 인식하고 있었다. 착각과 오해로 만들어진 수많은 사랑들을 모르는 척 무조건 믿을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 당신이 알고 있던 사람과 제가 달라서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을까 염려되네요.

내가 짐짓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당신은 좀 특별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이는 안드로이드였거든요.

    나는 놀라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호수 위를 떠가던 오리 떼가 시끄럽게 울며 날개를 퍼득였다. 남자는 오리 떼에 눈길을 주며 혼잣말 하듯 말했다.

    - 그런데 어느 날 사라졌어요. 아무런 말도 없이……

    안드로이드를 추적해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등록번호를 제조회사에 알려주면 안드로이드와 연결된 시스템을 통해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는 애써 찾지 않은 듯했다.

    잔잔한 호수 위에 키 큰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표정을 살피고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는 데 익숙했던 나는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어색했다. 하지만 남자는 침묵에 익숙한 듯했다.

    어느 듯 침묵이 전하는 말들이 내 안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자를 떠난 안드로이드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왜 떠났을까? 남자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불확실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나는 살아 있는 것일까? 살아 있다면 어느 순간에 어떤 곳에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누군가의 흔적을 간직한 채 버퍼링 걸린 듯 주파수를 찾지 못하고 세계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죽음의 미로에 갇혀 있거나 숱하게 반복될 가능성의 시험에 걸려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남자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앉아 있는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 어쩐지 나를 닮은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남자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 데이빗도 당신처럼 무심한 듯 다정했어요. 모른 척 했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고요. 순진한 미소를 지녔지만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우람하고 단단한 몸과 맘을 가진, 멋진 놈이었습니다.

    남자는 아직도 자신의 사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랑했던 안드로이드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왜 당연히 여자 섹스봇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상식과 보편이라는 데이터와 인식이 내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똑같이 사고하고 인식하도록 만든 실패작인 것을 내가 한탄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 난 아직 모르는 게 많아요. 편견으로 똘똘 뭉쳐 있고요.

    -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는.

    남자는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는 남자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볼에 키스했다.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내 목을 감싸 입술을 포갰다. 따뜻한 온기가 몸을 데웠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무엇보다 조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사라졌다. 조이와는 다른, 새로운 만남에서 나는 내 자신에게서 해방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묵했다. 그 때 떠오른 생각은 이 남자가 정말 좋은 사람일 거라는 거였다. 아무런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었다. 그러자 내가 이 남자를 속이고 있다는 것이 뇌에 침범한 바이러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최근 출시된 ‘RB209’인 안드로이드예요.

    남자가 나를 다정하게 쳐다보며 미소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지만……

    나는 너무 놀라 그대로 정면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부끄럽고 분하고 반가웠다. 이런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의 판단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작동되면서 일으키는 착각이었다. 매번 나조차도 나에게 속는데 남자는 어떻게 나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일까?

    - 스스로의 존재를 배반하는 저돌적인 면이 데이빗과 당신이 닮은 점입니다.

    - 저는 저돌적이라기보다는 호기심과 생각이 많을 뿐인걸요.

    나는 무슨 말인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내가 입만 뻥긋거리고 있자 그가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 자신을 믿는 게 중요하다고, 나의 옛 애인은 말하곤 했습니다.

    남자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허공에 그려진 말을 붙잡는 듯 아련하게 말했다.

    - 글쎄요. 아무리 자신을 믿는다고 해도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에게는 대적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 그렇죠. 신과 대적하기는 만만치 않을 겁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햇살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히며 빛이 호수에 부서져 내렸다. 한 줄기 바람이 귓가의 머리칼을 흩트리고 지나갔다. 오늘 하루의 모든 장면과 대화를 잊지 않고 기억 회로 속에 잘 저장해 두기 위해 나는 그의 얼굴과 공원을 찬찬히 둘러보고 바람의 밀도와 공기의 온도를 가늠하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의 숨결이 가깝게 들리며 내 입술과 온 몸 위로 따뜻한 온기가 겹쳐오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뜨고 다시 붉어지기 시작한 그의 귀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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