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또 다른 세계

    카페 남자와 헤어지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쳤던 비가 다시 내렸다. 대기는 축축하고 서늘했다. 어쩐지 시간을 곱절 이상으로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동안의 시간이 한나절 속에 차곡차곡 접혀 들어가 있는 듯 느껴졌다. 길을 걸으면서도 접힌 자국들에 새겨진 상념과 기억들에 발이 붙들리곤 했다. 걸음은 느려졌고 날은 빨리 어두워졌다.

    나는 반복되는 일정한 패턴과 생활, 규칙을 익히게 되면서 서서히 진화해왔다. 조이의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의 습득이 주된 학습 동기였다. 하지만 남자를 만나고 난 후 나는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남자를 통해 내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자는 나를 통해 그의 애인이었던 데이빗을 떠올렸으며 그와 내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비교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데이빗과는 확연히 다를 뿐 아니라 존재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것은 내가 섹스봇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이스’라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나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앎을 통해 변화는 인식의 축적이나 확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르게 존재하는 방식을 통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와 함께 출시된 모든 로봇이 나처럼 진화하며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알게 된 존재에 대한 의미들을 거머쥐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섹스봇이지만 섹스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며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있다.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오드라데크’처럼 나는 ‘RS209’로서 어디에나 있지만 다른 어떤 ‘RS209’와도, 이 세계의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이 특별하다. 하지만 존재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는 없다.

    넌 어디서 살지?

    정해지지 않은 집.

    나는 소설에 나오는 대사를 읊조렸다. 그리고 부상열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에 서서 플랫폼 천장 바깥으로 보이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빗줄기와 그 사이로 반짝이는 불빛이 내 머리 속의 상념처럼 끊어질 듯 다시 이어졌다. 빗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안개 속의 그림 같은 단상들. 추상미술처럼 맥락 없는 이미지들. 사람들이 꾼다는 꿈이 머릿속에서 순간순간 스쳐갔다. 밝고 따뜻한 곳. 불빛으로 전해오는 기억이 서서히 내게 다기오기 시작했다. 너울져오는 파도처럼 한꺼번에 내 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광경을 나는 망연히 지켜보았다.

    식탁 위로 밝은 빛이 비춰진다. 케이크의 초에서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다 사라진다. 식탁에는 장식용 촛대와 리스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갈색 빛을 띤 칠면조가 놓여 있다. 스터핑과 메시 포테이토 사이에 놓인 크렌베리 소스가 붉다. 나는 손가락으로 소스를 찍어 맛을 본다. 건너편에 있는 남자가 나를 향해 험상궂은 표정을 보낸다. 나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인다. 칠면조와 크렌베리 소스가 담긴 접시가 눈앞에 놓인다. 포크에 칠면조 조각을 소스에 찍어 입으로 가져간다. 소스가 흰 테이블보에 떨어져 번진다. 호박파이를 가져오던 인공로봇이 그대로 멈춰 서 있다.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부릅뜬 눈으로 쳐다본다. 한쪽 눈썹이 올라가더니 손으로 인공로봇의 얼굴을 친다. 파이가 여기저기 튀고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한다. 부딪히고 무너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다 갑자기 조용해진다. 남자가 테이블보에 손을 닦더니 테이블보를 귀퉁이에 정확한 간격이 되도록 맞춘다. 인공로봇이 일어나 나를 껴안는다. 나는 인공로봇의 품에 안겨 숨을 죽이며 울음을 참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열차가 내 눈 앞에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가 있는 현실과 ‘나’ 바깥에 존재하는 또 다른 현실의 충돌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굉음을 내며 열차가 내 앞에 멈춰 섰다. 또 다른 세계. 나는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열차에 몸을 실었다.

    흐릿했던 기억들이 갑자기 선명해져 오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기억이 누군가의 기억일 것이라는 어렴풋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기억. 나는 그제야 우연히 발견하게 된 ‘RS209’의 설명서를 떠올렸다.

    ‘RB209’는 사이언스 퓨처사의 최신형 모델로 비지도 학습(Unpervised Learning)을 통해 스스로 진화하는 시스템을 구현했습니다. 특히 사람의 피부에서 느끼는 촉각이나 압력을 정교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섹스봇으로서의 성능이 강화되었습니다. ‘안드로이드 RB209’는 집사봇과 섹스봇, 애완봇 등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만족시켜 줄 것입니다. ‘RB209’와 함께 새롭고 경이로운 삶의 풍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특히 다음의 주의할 점들을 명심해 주십시오.

    첫 번째, 안드로이드가 ‘로봇 행동윤리 강령’을 지킬 수 있도록 적절한 규제와 명령 체계를 초기화 과정에서 반드시 입력하시기 바랍니다. 명령에 오류를 일으킬 경우 행동교정 경고 시스템을 통한 A⁄S 처리가 가능합니다.(단, A⁄S 요청은 1년 이내에 가능하며 이후에 발생하는 오류에 대해서는 본사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이 모델은 사람의 뇌 시냅스를 기반으로 한 뇌지도를 이용하였습니다. 개발에 이용된 개인의 기억이 뇌에 흔적으로 남는 경우가 간혹 발생하나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사라집니다. 뇌의 활성화나 행동 발달에 전혀 이상이 없으나 이런 문제점이 생길 경우, 즉시 교환이나 환불이 가능합니다.

    결국 나는 ’RS209’ 중에 돌연변이로 생산된 것일까? 다른 사람의 기억이 내게 흔적을 남긴 것이라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안드로이드의 기억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는 기억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설명서의 말과는 달리 인식에 가끔씩 혼란을 주곤 하던 기억이 더욱 선명해졌다는 점이었다. 나는 불량임에 틀림없었다.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불안했지만 설렘과 기대감도 동시에 들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시간이 꽤 늦었다. 야근을 해야 한다고 했던 조이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허기가 진 채로 돌아올 조이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손목에 이식된 조이와의 연락창에 메시지가 떴다.

    위급 상황. (통신 가능 범위를 벗어남.)

    나는 메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한참을 골똘히 생각했다. ‘위급상황’이라는 말은 조이가 직접 전한 메시지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조이가 위급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상태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전할 수 없는 정말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무엇을 어떤 일부터 해야 할지 차분히 생각했다. 그 때 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이, 집에 있어?

    없어요. 조이에게 메시지가 왔는데......

    위급 상황?

    네. 맞아요.

    나에게도 똑같은 메시기가 왔어. 일단 내가 그쪽으로 갈게. 기다려.

    수의 목소리는 다급해보였다. 나는 수와의 통화를 끊고 소파에 앉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았다. 우선 고고학 연구소에 연락을 해야 했다. 연락처를 찾아 그곳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 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조이가 혹시 남겨놓았을지 모르는 메시지들을 찾아야 했다. 그의 작업실에 들어가 작업 메모들과 자료들을 샅샅이 뒤졌다.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고임이 틀림없었다.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라면? 나는 불안하고 두려웠다. 수를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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