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사랑 by grun

 

    십대의 후반이었을까, 소크라테스의 직계 후손인 것마냥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정언명령으로 삼아 살던 시기가 있었다. 존재의 의미를 찾는 데 골몰하며 유난히 자신을 기록하는 데 여념이 없던 어느 날이었다. 블로그에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올리고 무어라고 기록을 했다. 댓글이 달렸다. 나도 그 노래 좋아한다고. 그 댓글에 이야기를 더 이어 붙였다. 취향이 비슷한가 보다, 혹시 그 가수의 다른 노래도 좋아하느냐고. 이어진 댓글에 아는 노래 제목이 쓰여 있었다. '이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노랜데?'

 

나는 외적으로는 다수의 취향이길 원하고, 내적으로는 나만 알고 있는 것들이 가득하길 바라는 모순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공유할 수 있는 소수의 단짝을 늘 갈망했다. 황급히 댓글을 더 달았다. 단어와 단어의 나열로만 이루어졌던 댓글은 방명록 게시판으로 자리를 옮겨 몇 줄의 문장이 되었고, 몇 줄의 문장은 빼곡하게 모인 줄글이 되어 자연스레 그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는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 많았던 언니. 사는 곳은 지하철로 한 시간 남짓의 거리에 있었다. 목소리를 주고받다 보니 얼굴이 궁금해져 만나기로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데, 괜히 쭈뼛거리며 약속 장소에 서 있었다. 언니가 다가왔다. 어색했지만 단어와 문장, 더러는 목소리로 곧잘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라 그랬는지 처음부터 얼굴을 아는 친구였던 사이처럼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친구 같은 언니여서 좋았고, 언니 같은 언니여서 좋았다. 먹고 마시며 한참을 같이 공유하던 취향에 관해 이야기하다 노래방에 가자고 합을 맞췄다. 우리를 알게 해준 노랠 부르러 가자고.

 

퀴퀴한 방 한켠에 앉아 노래를 부르던 때였다. 노래를 고르고 있는 줄 알았던 언니가 살금살금 곁에 다가오더니 앉아 있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언니의 시선이 내 얼굴의 어느 부분들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어쩐지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건드리면 초록 재와 다홍 재로 폭삭 내려 앉아 버릴 것 같은 신부처럼 앞만 바라보고 노래를 불렀다. 눈이 예쁘다고 하는 언니 말에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이라도 짓긴 했을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떻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더라?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나를 살피던 언니의 시선이 아직도 내 얼굴께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언니를 전처럼 대할 수 없게 되었다. 고작 단어와 문장과 목소리뿐일지라도.

 

  몇 년이 지나 스물 몇 살이 되었다. 언니도 같이 나이를 먹어 나보다 서너 살 더 먹은 스물 몇 살이었다. 마치 서로 너무 바빠 어쩔 수 없이 왕래하지 못했던, 그런 친구였던 것처럼 뜬금없이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실로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교류하지 않은 시간만큼 서로의 사이에 커다란 여백이 느껴졌다. 여백을 채운 건 언니였다. 언니는 노래방에서 갑자기 내 무릎을 베고 누웠던 것처럼, 그때도 참 뜬금없었다.

 

나 너 좋아했어. 너 그때 알고 있었지?

 

그랬던 거냐며 짐짓 모른 척했다. 언니는 지나간 시간에 보일 법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나를 좋아했다는 걸 알고 내가 부담스러워 연락을 끊은 거라고 생각했단다. 네가 이래서, 저래서 좋았다는 부연 설명도 딱히 없었다. 너는 내가 처음 좋아한 사람이라는 말. 무언가 훌훌 털어내듯 언니는 그 문장을 뱉어내고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나만의 가정법에서 언니는 나를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언니랑 나는 자매도 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었지만 연인은 될 수 없었다.

 

  나는 언니도 잘 몰랐지만, 나 자신도 몰랐다. 스물 몇 살도 훌쩍 보낸 지금 언니가 다시 내 무릎을 베고 내 얼굴을 좇는다면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언니의 시선에 화답할 수 있을까. 언니. 언니를 언니로 한정 짓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헤어졌더라도 한때 많은 것을 나누고 서툴렀던 어린 연인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0)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