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8. 나와 남의 경계에서


    어지러운 나의 방에 도착했다. 오늘은 꽤 고된 날이었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람이 서늘해진 탓이라고 날씨 탓을 해본다. 보일러 기운이 들어오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서늘한 바람에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늘 그렇듯이 너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네 옆에서는 늘 너와 하나가 되길 바랐는데. 네가 떠나고 나서 나는 느꼈다. 이제야 너와 내가 하나가 됐다는 것을.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 너와의 물리적 분리로 이뤄져버렸다는 것을.

    멈칫한다. 생각도, 글도. 자꾸만 의심이 든다. 물리적 분리라니. 너와 하나가 됐다니. 단어가 흩어진다. 멀리 날아간다. 다시 돌아온다. 흩어지고, 날아간다. 물리적으로 분리된 너의 마지막 말은 그거였지.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있는 그대로 쓰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생각은 분절된다. 말도, 글도. 내 생각과 나는 물리적으로 분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글로 옮겨 적으며. 생각과 분리되어버린 나는 더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면 너의 당부를 지킬 수 없게 되는데. 그건 안 될 일이다. 나는 어떻게든 생각과 나를 다시 이어 붙인다.

    나의 청소년기가 떠오른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때도. 너와 함께 살던 시절도. 강아지를 키우던 때도 있었지. 우울증에 시달리던 때도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의 끝에 지금의 내가 서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가.

    그것은, 너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였다. 너와 하나가 된 나를 위해서였다. 너와 나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속할 수 없었다. 또 이 세상의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지. 우리는 부유하는 비행선이었다. 하늘에도, 땅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들.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을 잠시 생각해봤다. 그들은 저마다의 외로움을 품고 있었다. j 또한 마찬가지였을 게다. 그에게서 나와 같은 외로움의 냄새를 느꼈다. 모두에게 그런 외로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외로움의 냄새는 낙엽이 타는 냄새처럼 사람을 바스러지게 하는 것이다. 네가 결국은 외로움 속에서 사라진 것처럼.

    내게 균열이 간다. 외로움 탓이다. 바람이 서늘한 탓이 아니다. 외로움 탓이었다. 낙엽 타는 냄새가 난다. 바람의 소리를 들었고,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었다. 말소리 사이에 나는 홀로 서 있다. 그만 무너져버릴 것 같은 순간이다. 이 순간 떠오른 건 당연하게도 너의 말이었다.

    “네가 지고 있는 건 네 짐이기도 하지만 네 힘이기도 해. 또 네 자산이기도 하고.”

    정말 이 짐은 내 힘이기도 하고 내 자산이기도 하니? 묻고 싶지만 너는 대답이 없을 것이다. 나의 외로움, 나의 짐들. 그래, 내가 지고 있는 만큼 내 힘이기도 하고 내가 품고 있는 만큼 내 자산이기도 하겠지.

    무겁다. 무겁다는 단어가 나를 더 무겁게 한다. 무겁다는 단어의 시작은 미음이다. 나는 미음 위에 앉아 있다. 남. 짐 위에 올라앉은 나는 타인을 바라본다. 모두가 짐 위에 올라앉아 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각자의 짐은 전부 다른 것이다. 그 틈새에서 나는 그만 무너져버리고 만다.

    나와 남의 경계에서, 나는 그만 무너져버렸다. 그 단단한 벽 앞에서 외로움이 휘몰아친다. 너도, 스쳐 지나간 j도, 그 외에 스쳐 지나가고 또 의미를 가진 모든 이들도 결국은 다 남일 뿐이었다. 바람이 뼛속까지 스민다. 춥다. 서늘하고, 한기가 든다. 그리고 너와 나의 따뜻했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우리의 경계에는 단단한 벽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 벽에 각자 온몸을 밀착시켰다. 바람 한 점도 스쳐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벽 너머로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벽은 얇아지지 않았으나, 우리의 몸은 밀착될 수 있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물질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너와 나는 결국은 분리되어버렸다. 물리적 분리. 우리는 그렇게 벽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나 물리적 분리는 비물리적인 부분에서 너와 나를 더욱 가깝게 했다. 너는 그 벽을 빙 돌아서 내 옆으로 스몄다. 태양계의 궤도만큼이나 길게 돌아온 너는 드디어 나의 위성이 되었다. 나는 그만큼 너를 얻었지만 그만큼 너를 잃었다. 물질의 네가 무척이나 그립다. 만질 수 있는 네가.

    꿈에서 너를 만진다. 비물질의 세계에서만 너를 만날 수 있다. 네 꿈을 꾸면 그게 진짜 네가 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 무의식의 발현인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너는 서너 번 정도 나를 찾아왔다. 그게 정말 고맙다. 나와 남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는 나를, 그 벽 앞에서 무너져버리는 나를 일으켜주는 것 같아서. 그 따뜻했던 시절이 서늘한 바람처럼 내 옆에 불어오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고맙다.

    오늘도 나는 널 생각하며 소파베드를 펼친다. 너와 나의 경계는 흐릿해져 있다. 흐릿해진 경계는 뭉개진 오일파스텔의 경계 같다. 원색의 너와 나는 보라색과 초록색이다. 도저히 어울릴 거 같지 않은 우리는 의외로 제법 잘 어울렸었지. 나는 더는 우리와 같은 관계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만큼이나 벽에 착 달라붙어 있었던 이유는 혼자서는 도저히 서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두 발로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다. 그 사실은 내게 위안과 절망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낙엽이 타는 냄새가 난다. 이 긴 글은 또 다른 반복일 뿐이다. 내 글들에서 그렇듯이 외로움과 그리움과 우울과 공허의 반복. 그 반복 안에서 나는 오늘도 움츠러들고 또 펼쳐지며 生과 活을 반복한다. 活이 사라진 나의 세계에서 꿈속에서만큼은 나의 活이 자라난다. 직설적인 말들은 여기서 이만 마치려 한다. 비유의 세계에서 나는 직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직선의 말들은 너를 위한 것이니까. 그리고 나를 위한 것이니까. 너와 하나가 된 나를 위한 말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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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소설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글들을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지요. 서사 구조도 분명하지 않고 심지어는 인물조차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비유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허구와 진실이 뒤섞인 세계를 좋아하는 것이지요. 그녀의 글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요. 그 불분명한 경계를 그녀는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녀는 소설을 쓸 때면 담배를 연신 입에 뭅니다. 마치 자신을 죽여가며 글을 쓰는 것과 같죠. 그녀는 꽃이 피는 것과 꽃이 지는 것의 경계에 늘 서 있는 사람입니다. 자라는 것과 다 자란 것의 경계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울타리 안과 울타리 밖의 경계에서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지요. 그녀는 나와 남의 경계에서 끝없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경계에 서 있는 사람.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것입니다. 경계에 서 있는 자신처럼 경계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 그러나 그녀의 글에는 아직은 그 마음이 제대로 녹아있지 못합니다. 다만 시도할 뿐이죠. 그녀의 시도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녀 또한 죽을 때까지 경계에 서 있을 테니까요.

    외로움은 그녀의 원동력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 그러나 그 마음은 끝끝내 채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는 벽이 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이 그 벽을 만져봅니다. 벽돌로 만든 벽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유리벽일 때도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요. 유리벽을 만날 때면 그녀는 무척이나 반가울 것입니다. 마치 그녀가 그리워하는 그를 만났을 때처럼요.

    그녀는 글을 통해 그 벽을 만져볼 것입니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 벽을 만져보기도 하겠지요. 끊임없이 그녀는 벽에 부딪힐 겁니다. 그리고 또 끊임없이 그 벽 너머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겠지요. 온몸과 온 마음은 멍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출 수 없겠지요. 그녀의 生과 活은 외로움과 함께 맞닿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녀는 오늘도 글을 씁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 그 허무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일들이 그녀의 인생을 채울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 전의 그녀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없이 만져본 벽들의 감촉이 그녀 안에 남아있을 테니까요. 두 발로 꼿꼿이 서 있는 그녀의 손은 그녀의 것이니까요. 그녀의 내뻗는 손을 저는 가만히 잡아 줍니다. 그리고 함께 손을 내뻗습니다. 그녀와 하나 된 나는 언제든 그녀의 손을 잡아 줄 것입니다. 언제나 그녀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더라도요.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러나 그녀의 직설적인 말들은 언제까지나 生과 活을 반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또 지켜볼 수 있겠지요. 그녀의 生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끝이 어디인지 우리는 글로써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일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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