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tration ⓒ 은수 스스로의 눈을 가린 욕망 연말연시를 앞두고 박원순 전 시장(이하 박 시장) 성폭력 사건에 대한 새로운 뉴스들이 쏟아져 나왔다. 박 시장의 자살 당시 언론이 가장 주목했던 것 중 하나는 피해자의 고소 사실을 누가 박 시장에게 알렸는가 하는 문제였다. 피소인의 죽음으로 인해 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되는 것은 이미 예정된 바였고,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위치에 있는 서울시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진상조사다. 피해자는 과거에도 거듭 인사담당자 등을 통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서울시가 공표했던 성인권 기본 조례에 따라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피해자의 고충은 번번이 묵살해왔다. 피해자가 궁극적으로 택한 방법은 법률적 해결이 되었고, 그마저도 피소인의 자살로..
사건의 시작 사체가 발견된 것은 지난밤이었다. 마지막 퇴근자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문득 로비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사체는 놀라울 만치 깨끗했지만,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곧 경찰이 도착했다. 왜, 누가 사체를 그곳에 두었는지, 어떻게 그가 죽었는지에 대해 대중의 관심의 집중됐다. 사체는 신원불명이었고, 기이한 것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이 사체의 부검 결과였다. 내상으로만 판단했을 때, 이 사체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어야 했다. 사지는 아무렇게나 절단되어 있었고, 여러 차례 찔린 듯한 자상으로 인해 장기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얼굴은 기묘하게 어그러져 있었는데, 매치되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외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전날 회의에서 여러 차례 ..
우울해본 적 있나요? 몇 년 전부터 나는 빌리 아일리쉬에게 흠뻑 빠져있다. 빌리 아일리쉬는 특유의 음울하고 자기파괴적인 가사와 몽환적인 음색으로 큰 인기를 끌어왔다. 지난 7월,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발표했다. 《my future 나의 미래》에서 그녀는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달뜬 목소리로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졌고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빌리의 음울한 노래들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마음 아파했던 나로서는 그녀가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비슷한 시기에 나 또한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 환경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이다. 내 삶을 이렇게 불안으로부터..
*이 에세이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존중 지난 8월부터 다시 상담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번엔 상담이 중심이 아닌, 약물 치료가 중심이다. 박원순 성폭력 사건을 시시각각 접하면서 이전에는 없던 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불안이 극에 달한 나머지 공황 장애가 생겼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건, 제대로 숨이 안 쉬어져서였다. 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허벅지의 살을 맨손으로 모두 잡아 뜯어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고, 공황 장애에 대한 공포를 처음으로 체감했다. 강렬한 자학의 충동과 함께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손톱 밑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줄곧 살고 싶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매일 새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일상을 간신히 유지하..
*이 에세이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불안-일기 쓰기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자기계발이나 대단한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SNS를 통해 자유롭게 발언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해석될지, 말하지 않은 부분이 계속해서 탈락하고, 나아가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 점점 더 커지면서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를 틀어놓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또한 아무도 없는 집에서 TV를 켜놓곤 했다고 한다. 공백을 채우려는 이 습관이 어떤 정신작용에 의한 것이라면, 왜 인가? 주위 사람들은 이런 나의 습관을 기이하게 여기거나 걱정스러워하거나 재미있어한다. 그들의 반응처럼 다양..
뭐지, 이 온도 차? 언제부턴가 한국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다. "한국 영화"라는 장르 하나가 생겨도 좋을 만큼 한국 영화의 소재 및 서사는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 영화인이 배제된 소위 '알탕 영화'들이 매번 다른 제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여러 가지 환경 탓도 있겠지만, 정형화된 남성 중심 서사의 시장 공급에 문제가 될 만큼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히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남성 중심 서사/여성혐오 영화에 대한 폐기를 주장하는 비판 여론이 강하게 일면서, 한국 영화판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여성을 중심으로 한 영화들이 조금씩 시장을 넓혀가면서, 지난해 하반기에는 , , , 등의 다양한 여성 서사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 는 국내외 ..
변화를 원한다지만 최근 몇 년 간 회사 내 직원들의 불만은 날로 쌓여갔고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사실상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창립 이후로 쌓여온 그릇된 조직문화에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으나,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근로 환경 및 업무 절차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했다. 사측은 근로자총회를 통해 제기되는 근로자들의 의견을 번번이 묵살해왔고, 나은 경우엔 개선 방법을 제시하라고 답했다. 사실 직원들 대부분이 제대로 된 노동인권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부당하고 어떻게 개선되어야 할 것인가 근로자 측에도 뚜렷한 묘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근로자총회에서 노조 결성을 위한 찬반 투..
그는 정말로 잊었는가 며칠 전, 모임이 끝나고 식사하는 자리에서 있던 한 사람이 한국의 민주화가 얼마나 힘겹게 얻어진 것인지 요즘 홍콩 시위를 보며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자리엔 7,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었던 한 남성 대표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그는 홍콩 시위에 대해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같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라 답했다. 그리고 홍콩 시위에 미국 자본이 유입되고 있다는 루머를 덧붙이며 결을 같이 하여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가, 민주화에 목소리를 높이다 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그가, 어떻게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해, 그들의 목소리를 진영 논리의 프레임에 가두는 말을 쉽게 말할 ..
*본 에세이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건 꿈인가? 내가 기억하는 한, 제일 오래된 꿈은 무엇일까. 아마도 너 다섯 살 무렵. 나는 물속에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산에 놀러 간 것 같다. 녹음이 짙은 숲을 한켠에 두고, 들쭉날쭉한 바위들이 계곡을 따라 넓게 퍼져있다. 나는 열심히 아빠를 따라 가고 있었다. 아마 그러다 중심을 잃고, 물속에 떨어진 듯하다. 열심히 허우적대보지만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물 밖에서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영화 의 첫 장면은 이 오래된 꿈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은희네 집에서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들.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냐는 아버지의 고함과 서럽게 들썩이는 울음소리… 배경과 배역이 조금 다를 뿐,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생히 깨..
어떤 기억들은 남아 아주 어릴 때의 기억들 중 어떤 것들은 한참 자라고 나서도 남는다. 어느 주말, 동생과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며 놀고 있었다. 그날은 부모님이 하루종일 집을 비웠고, 다른 때보다 늦게, 오후 8시 즈음 집에 돌아왔다. 부모님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왜 동생의 숙제를 챙기지 않았는지 나를 호되게 혼냈다. 문방구에서 무언갈 복사해오는 일이었는데, 동생과 노느라 깜빡한 것이다. 나는 펑펑 울며 어둡고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 문방구에 다녀왔다. 잔뜩 의기소침해진 나는 조용히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때 왼편에 걸린 거울로 가족들이 보였다. 엄마와 아빠, 동생이 상을 둘러 앉아 늦은 저녁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불 꺼진 현관문 앞에 그대로 서서 잠시 그 모습을 바라봤다...
※ 본 리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로 떠난 아이 나를 포함하여, 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편부모 가족의 가슴 따뜻한 성장 서사, 벅차게 흘러가는 영상들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하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겼던 장면은 철창 안에 갇힌 늑대를 홀로 바라보던 둘째 아메의 뒷모습이었다. 늑대가 있는 쪽은 환한 빛으로 가득하고, 아이가 선 쪽은 철창과 같이 어둡다. 갇혀 있는 쪽은 늑대인데, 그 앞에 선 소년이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늑대와 인간의 혼종으로 태어난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왜 동화 속 늑대는 항상 나쁘게 묘사되는지 의문스러워했다. 성장의 기로에 서서 무엇으로 자라야 할지 알 수 없는 아이는 인간..
적응할 수 없는 사회 이 영화는 한 여성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쿠미코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 사회 부적응자로 주로 이야기된다. 쿠미코가 일하는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그는 회사에서 연차가 좀 쌓인 직원으로 보인다. 사장은 수시로 쿠미코를 불러 차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물론, 퇴근 후 자신의 양복을 세탁소에 맡기거나 부인에게 줄 결혼기념일 선물을 사 오도록 지시한다. 쿠미코는 사장에게 줄 차를 끓인 뒤 침을 뱉을까 말까 고민하다 황급히 침을 삼키기도 한다. 그에겐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일 것이다. 그에게 무기력은 일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은 지각한 쿠미코를 불러 앉혀놓고 묻는다. 자네 나이가 몇이지? 이제 슬슬 나갈 때가 되지 않았나? 사장은 노골..
*해당 에세이는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복수를 상상해본 적 있는가? 구체적으로 특정 개인을 파괴해야겠다는 욕구를 느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나는 있었다. 오래 전 내게 스토킹과 자살 협박을 했던 한 문인, 나는 매우 오랫동안 그를 죽이고 싶었다.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운동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 나는 내가 겪은 거지같은 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뒤늦게 밀어 닥치는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가해가 진행됐던 그 시간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출근길 지하철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어둠 속을 노려보며, 나는 수도 없이 상상했다. 매일 아침 그의 집에 찾아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를 죽인다. 혹은, 과거로 돌아가 자살하겠다고 협박 전화를 받던 그때로 돌아가 온갖 통쾌한 말..
이거나 먹어라, 세상아! 영화는 이니드와 레베카가 졸업식장을 뛰어 나와 학사모를 집어 던지고 학교를 향해 쌍뻐큐를 날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니드가 졸업을 해서 아쉬워하는 건 찌질한 데니스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이니드와 레베카는 우선 돈을 모아 독립해서 같이 사는 것을 제1목표로 삼는다. 서로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둘은 졸업식을 기점으로 점차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다. 졸업식은 했지만 이니드는 학교에 남아 마지막 미술 수업을 들어야 했고, 레베카는 곧바로 까페에 취직하게 된다. 둘의 각기 다른 행보는 그들이 입는 옷에서도 드러나는데, 영화 내내 이니드는 이전과 같이 옷이나 머리를 통해 변덕스러운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사회인이 된 레베카는 중반부터 깔끔..
노년의 삶 2018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다큐는 아르헨티나, 스페인, 우루과이에 사는 노년 여성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은퇴 후 거의 매일 오후 가까운 동네 영화관을 찾는다. 노르마는 일 년에 한 번 타 지역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갈 정도로 열성적인 씨네필이다. 사전에 일정을 꼼꼼히 확인하고 상영 시간에 맞춰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방금 본 영화를 잊지 않기 위해 영화제 카탈로그에 짧은 후기를 남기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씨네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모습이다. 그의 삶은 앞으로 만날 영화에 대한 설레임 속에 있으며 여전히 역동적이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는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사회에서도 무언갈 사랑하고 설레이는 감정은 주로 젊은 세대의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