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하고 천천히 발음해 본다. 제주도에 아무런 연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울림에는 어딘가 팍팍한 정서를 감싸 안아 돌봐주는 향수가 있다. 나를 공격하고 아프게 하지 않는 섬, 제-주-도—-.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제주도까지 내려가서 둥지를 틀고, 책방을 열고, 도자기를 빚고, 음식을 만들고, 같은 컴필레이션 음반에 본인의 노래를 수록하는 이유는 이 향수에 있을 것이다. 삶의 내/외부를 점철한, 충만한 안전에 대한 향수. 삶은 많은 점과 굴곡이 총합된 하나의 선이다. 선은 똑바로 가려 하지만 외부의 작용 때문에 수그러들기도 하고, 스스로를 관통할 것처럼 예리하게 치솟기도 한다. 이 선은 그냥 두면 금세 나의 통제 바깥까지 뻗어나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의도적으로 완..
나의 왼 팔뚝에는 눈에 띄는 크기의 갈색 점이 하나 도드라지듯 나있다. 엄마도 나와 똑같은 위치에, 비슷한 크기의 갈색 점이 있다. 내 점과 엄마의 점을 번갈아서 보다 보면 내가 어느 날 아무런 근본도 없이 세상에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엄마의 몸에 잉태되어 엄마의 피와 뼈를 깎아 먹으며 자라다 느닷없이 연결을 끊고 엄마의 포궁에서부터 탈락해 엄마의 몸을 찢고 나와서야 비로소 한 명의 인간이 되었음을 소스라치도록 느끼게 된다. 말 그대로 나는 엄마의 안팎을 찢고 세상 밖에 나왔다. 엄마는 나를 세상 밖으로 뱉어 내려고 17시간 동안 진통하며 간호사들에게 수도 없이 뺨을 맞았다고 했다. 17시간 진통을 하니 아픈 것보다 기가 빠져서 자꾸 잠이 오더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때 자면 그대로 죽는..
나는 때때로 관계에 대해 바라는 것이 지나치게 많았음을 고백한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연인들에 대해 대체로 많은 것을 수용하는 좋은 연인이었고 그것을 담보 삼아 내가 받고자 하는 것을 연인에게 달라고 요구하며 관계를 맺거나, 파탄 내거나, 주도해갔다. 그런 요구에 목줄 메인 개처럼 끌려다니던 연인들은 언제나 너무 빨리 지쳐버리곤 했다. 지친 그들이 가장 손쉽게 취하는 방법은 이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해를 포기하면 나는 ‘그래, 네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 너는 그냥 개인데.’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놓아주었다. 그들은 관계의 일부분에서 그들 스스로가 그런 취급을 받은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는 나의 놓음에 쫓겨 사라졌다.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당시의 연인이던 W에게 과거 있었던 일을 아주 어렵게 털..
주변인들에게 이를 털어놓아야 할까, 털어놓는다면 누구에게 먼저 이야기해야 할까 등을 고민하며 일상을 지킨 지 한두 달여가 되어가던 어느 날, 우연히 다니던 대학 내의 상담실 홍보간행물을 보고 상담 치료를 시작할 마음을 먹었다. 당시의 나는 학교를 늦게 복학해 마저 다니느라 삶의 터전을 꾸려 놓았던 서울로부터 홀로 떨어져 먼 지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오전과 오후 시간에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오후 늦은 시간부터 새벽 늦게까지는 영상 기획이나 편집 작업을 하여 생계를 꾸리고, 주말에는 누드모델로 일하거나 앞선 화에서 말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거나 당시에 교제하던 남자친구를 만났다. 사방에 낯선 타인들만이 가득했다. 규칙적이고 피로하고 목가적인 나날의 연속에서, 어디에도 털어놓고 의논할 곳이 없..
*** 타인의 성폭행피해생존담에 트리거가 있으신 독자분들께서는 이번화 구독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7년쯤 잊고 있던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지금은 2017년 5월 29일의 아침이다. 부지불식간에, 삽시간에 쏟아지듯 기억이 회복되는 감각을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 기억은 너무나 참혹하고 믿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에,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르자마자 그 직후에 바로 그것을 부정한다. 실내 온도가 23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따뜻한 나날 중에 전기장판까지 틀어놓고도 온몸이 저릴 정도로 차가워지는 이상한 증세를 겪으며 몸을 떤다. 그날까지 처리해야 할 과업들이 있지만 도무지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다. 결국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스틸녹스 10mg을 복..
안녕하세요, 본격적인 연재에 앞서 당신께 인사를 드립니다. 제 이름은 김경진입니다. 2019년인 올해 29세가 되었고, 여성이고, 성폭행피해생존자이며, 사무실 노동자였으며, 차별받았던 딸이고, 누드모델인, 당신의 주변에 흔히 있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한때 영화 공부를 했고 영상 제작 일을 했었지만 직업적으로 무언가 이룬 적이 없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글로써 한 번도 성취해 본 적 없는 작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인 제가 많은 분들이 애정을 담아 구성하고 있는 소중한 웹진인 쪽에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말로는 제가 잘 하지 못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큰 제목을 라고 정해 놓고 나서야 비로소 글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언젠가 글감이 되겠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