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도들은 사랑에 대한 형태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개인 단위의 운동인 동시에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응시하고자 하는 작은 꿈틀거림이었다. 개인이 스스로를 알아가고자 하는 서사는 언제나 도전적이고 치열한 아름다움을 동반하지만, 이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행동 저변의 못난 이유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내가 포용할 수 없는 많은 룰들이 두려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해야 하는 독점 연애의 룰, 자식이 이유 불문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정상 가족의 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많은 대상화-침해의 룰에서 탈출하고픈 마음이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룰의 바깥으로 벗어난다고 해도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사..
가지지 못한다. 가지지 못함, 소유 개념이 부재하는 관계 맺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연애 이야기만큼 적당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연애야말로 소유욕이라는 것이 가장 철저하게 투영되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소속되는 것과 소유되는 것은 분명 다른데, 연애 관계에서만큼은 이것이 자주 혼동되거나 혼용되는 것 같다. 다들 그런 얘기를 하니까 말이다. 넌 내 것, 난 네 것, 대부분 그러면서 연애를 하니까 말이다. 나의 첫 연애는 열일곱 살 때였는데, 나는 그때부터 그런 말을 하지 못하는 애였다. 그때는 폴리아모리 같은 개념조차 몰랐는데도 그랬다. 폴리아모리(흔히 비독점적 다자연애라고 번역한다. 나는 ‘다자연애’보다 ‘비독점적’이라는 텍스트를 더 강하게 읽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개념은 좀 더 자라..
몸의 난조로 몇 주를 앓았다. 지금은 회복 중이다. 근래의 몇 주 중 오늘이 가장 선명하다. 이 정도라면 다시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또 쓰기를 시작한다. 일주일은 속탈이 나서 위염과 장염을 동시에 앓았고, 달팽이 같은 속도로 몸을 회복하던 차에 어디에선가 독감을 얻어 또 2주 남짓을 앓았다. 침대에 돌멩이처럼 고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온종일 누워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소리가 너무 크구나, 떨어지지 않는 열에 휩싸인 채로. 눈꺼풀이 뜨겁게 떨리는구나, 하다가, 간신히 일어나서는 과일이나 시리얼 같은 것으로 끼니를 챙기고, 약을 삼키고,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감으러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억지로 눈을 뜨면 세상이 눈 안쪽으로 쏟아지는 것처럼..
당시 나를 케어해 주었던 배우의 말처럼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어떤 모습의 삶인지는 알 수 없다. 연재를 늦추는 기간 동안 지금껏 그러한 삶을 상상해보려 노력했지만, 나는 아직껏 행복한 상태와 잘 견디는 상태 사이의 어떤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다. 이제껏 꾸준히 써온 바에 의하면 나의 삶은 견디고, 끌어안고, 수렴시키는 연습의 일환이었던 듯도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넘어지고, 넘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느린 속도로 한 손에 흙을 그러쥔 채 일어난다. 한 손으로는 몸을 지탱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살아냄에 스스로 내려보는 진단이다. 진단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직면하고자 하는 의지이므로, 나는 스스로의 삶을 때때로 진단하고 이름 붙이는 행위를 멈추지 않으며 살 것이다. 반복과 추가, 나는..
분명히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작업인데도 나는 이 장소에서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함께 참여하는 다른 참여자들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참여형 무대가 되는 건물 한 동 전체가 새까만 암전이었기 때문이다. 씻을 때도, 먹을 때도, 침대에 누울 때도, 복도를 걸을 때도, 준비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다른 방에 들어갈 때도, 암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공간은 기획된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다. 기획된 어둠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어둠보다 훨씬 더 짙었다. 이 어둠 속에 24시간 있으며 순서대로 정해진 프로그램을 수행해야 했다. 제일 먼저 이름과 소리를 정하는 시간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서로를 식별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 고유의 소리를 정하고, 고유의 소리를..
근래에는 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 2월 말쯤인가부터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프로젝트가 입 밖으로 나올 수 있을 만큼 구체화 된 게 6월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프로젝트를 같이 할 만한 주변 지인들을 끌어모으고, 현재까지도 기획과 마음가짐을 구체화하고 있다. 내 행동이라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놓아주는 좋은 지인들 덕에 꽤 좋은 조건에서 작업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덕분에 나를 재촉하지 않는 사람들과, 보다 풍족한 환경에서 생각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나를 재촉하고 쇠약하게 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마침내 실행을 앞둔 시점인지라 여기에다가 어떤 내용의 작업인지를 상세하게 쓸 수는 없지만, 타인과 타인이 대면하고 나와 내면이 직면하는 경험을 준비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내면에는 ..
언젠가부터 두 달에 한 번은 꼬박꼬박 만남이 성사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20대 초반에 시작한 인연을 지금껏 이어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같은 업계에 있지 않고 같은 고충을 공유하지 않으면서도 만나지 않으면 생각나고, 생각하다 보면 만나고 싶어지고, 만나고 싶으면 서로의 노력으로 만남을 성사할 수 있는 것 자체에서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그와의 관계 맺음에서, 언젠가 반드시 만나질 것이라는 확신과 안정감을 얻는다. 게다가 그는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내가 쓰는 글을 기꺼이 읽고 진솔한 감상을 종종 전해 주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언젠가부터 나는 쓰기가 어려워지면 그를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그를 만난다고 해서 무언가 명확한 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답을 요구하기 위해 그를 만나려 하지..
또다시 다섯 개의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나날들을 그저 보냈습니다.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일상에서 기록된 몇 가지의 문장을 쥔 채 다시 고민을 시작합니다. 고민이 되기 전의 문장들을 펼쳐놓습니다. 여기에 문장이 있습니다. 모쪼록, 나날을 보내는 만치 가볍게 읽어주세요. 읽고 잊어버려 주세요. 30만 원. 30만 원은 조금 묘한 액수다. 아주 값어치 있는 돈도, 아주 값어치 없는 돈도 아니다. 지금은 연이 끊긴 지인이 싸게 주겠다고 흥정했던 작은 스쿠터도 30만 원이었고, 누군가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도 자주 30만 원만 빌려달라고 했었고, 서울에 자리를 잡을 때 보고 다녔던 집세 싼 곳의 원룸들도 보통 보증금 500에 월세 30으로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다. 스쿠터보다 택시를 ..
5년 전인가 6년 전인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하여튼 나에게 처음 결혼 얘기를 꺼낸 남자는 내가 20대 초 중반이던 시절 연애하던 남자였다. 그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았고, 결혼을 무척이나 하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의 나는 서른 살쯤 넘으면 천천히 결혼 같은 것도 생각해 보겠다는 입장이었고 내 입장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그는 틈만 나면 우리 둘 다 안정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그랬던 것 같다. 사실 내가 그린 인생의 그림에는 ‘결혼한 나’라는 것이 없었다. 남의 울타리 안으로 편입되면서 내가 타자화되는 것이 불쾌하고 무서웠다. 이 불쾌함과 무서움의 근본이 되는 사건이 몇 차례 있었다. 가장 최초의 사건은 일곱 살 때다. 내가 일곱 살이고 동생이 다섯 살이던 어느 겨울날, 엄마는 나갈 채비를..
(9화 : 결혼이 뭐길래 후편은 다음 주에 연재됩니다.) 연예인 설리가 영면한 후 며칠이 지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최초의 보도가 이루어진 날, 여러 반응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끓어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어떻게? 왜? 너무 많이 힘들었구나, 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그를 애도합니다, 당당해 보였는데 아팠구나, 그가 어찌어찌해서 죽었대요, 그가 자살을 했대요, 가장 험한 곳에서 가장 격렬히 싸워준 사람, 저 SNS 잠깐 접을게요, 그런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가 다른 글들이 올라오며 빠른 속도로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군중심리가 작동해서 뭐라고 꼭 글을 올려야 할 것 같은 이상하고 희박한 의무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번에 당면하게 된 죽음은 그런 의무..
대학 시절, 생활비가 급해 무슨 일이건 일단 받아서 하던 시기에 지인의 소개로 잠깐 결혼정보회사에서 일을 받아다 한 적이 있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전달해주는 프로필들을 보고 적당한 멘트를 만들어내어 누군가의 구혼을 돕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유튜브 같은) 온라인 영상 콘텐츠들에 관심이 집약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온갖 업계에서 본인들이 하는 일을 영상 콘텐츠화 하려고 애쓰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연히 조회 수는 별로 나오지 않았다. 만드는 사람들도 프로필을 제공하는 사람들도 사실 그 콘텐츠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가 만들어낸 멘트는 성우의 입을 통해 읊어진 다음 별로 촘촘하지 못한 기획으로 만들어진 모션그래픽 화면과 함께 온라인에 올라갔다. 기획을 촘촘하게 하고 사람마다 멘트를 차별성 있게..
이번 연재의 작은 제목을 자취하는 여자라고 정해놓고는 자취하는 여자,라고 조용히 읊조려 본다.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실상 대단히 불손하다. 언젠가 ‘자취하는 여자’라는 주제로 작업한 사진들을 본 적이 있는데 반라의 여자가 속옷을 반쯤 내리고 변기에 앉아있는 모습이나 통돌이 세탁기 안에 들어가 고혹적인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었다. 이 이미지들을 처음 접했을 때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자취하는 여자는 인기가 좋다는 저급 농담의 저변에 깔린 성적 판타지가 그대로 투영된 이미지들은 현실과는 너무 거리감이 커서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내가 그 ‘자취하는 여자’다. 2009년 9월 초쯤 집에서 쫓기듯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으니 올해, 2019년 9월이 지나 자취하는 여자 10년 차..
엄마에게. 엄마, 사실 원고를 한 주 쉬었어요. 내가 의식이 온전치 않은 사이에 자살기도를 해서 응급실에 갔었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온몸이 몸살 난 것처럼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원고뿐만 아니라 일도 펑크를 냈고, 요즘 듣고 있는 수업도 펑크를 냈어요. 일상을 놓지 않으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자책감이 아주 컸어요. 스스로를 잘 돌보지 못했고, 혼자서 잘 견디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큰 한주였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꾸역꾸역 엄마한테라도 편지를 써보는 거예요. 더 멈춰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글이 책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두 주나 쉴 수는 없어서 이번 주에는 꼭 원고를 쓰고 싶었어요. 주제도 미리 몇 주 치를 추려놓은 상태였는데 엄마는 참 안 도와..
사실 우울을 화두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다. 누군가에게 우울은 분명히 질병일 것이다. 진료에 따른 상담과 복약으로 많은 부분 도움을 받고 더 편안하게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에게 치료 자체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온 이 글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모든 글은, 아무리 적게 읽혀도 결국 읽힌 이들에게 영향을 행사한다. 이 글 때문에 치료를 진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더 힘든 상황에 놓이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법은 없다. 그런 분들에게 우선 말하고 싶다. 치료로 효과를 보고 있다면 치료를 지속하시라고. 당신의 방법이 당신에게 가장 최선이며, 당신은 이 글 때문에 불필요한 의문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이 ..
이번에 공개하는 글은 사실 같은 제목으로 쓰는 두 번째 글이다. 첫 글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마감이 이틀 남은 시점에 다시 원고를 하고 있다. 첫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이번에는 우울에 대해 쓰자고 스스로 정해 놓고도 ‘내 우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거나,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우울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상대방을 납득 시키는 과정이 매번 껄끄럽고 숨 막히는 일이기는 했지만, 내가 이 화두 앞에서 이만큼이나 비겁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근데 나는 글을 쓰고 있을 당시에는 정말로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왜 원고를 하는 내내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고 손이 멈추는지 몰랐다.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썼던 ..
온전히 생존기를 연재한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습니다. 두 달 동안 다섯 개의 이야기를 했고, 열 편의 글을 썼습니다. 다섯 개의 이야기마다 궤적에 쉬는 선을 하나씩 그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지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며, 글감이 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버린 어떤 감각 산물들에 대한 애정입니다. 일기 쓰듯 일상의 편린을 눌러 담아 둔 몇 개의 문장을 공개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아침. 나의 방은 해가 떠 있는 시간 중 아침이 가장 어둡다. 아침의 해는 부엌 테이블 자리에 양껏 빛과 열을 끼얹고는,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시간에 잠깐 내 방에 들러 쉬다 간다. 나는 언제나 평이하고 덤덤한 빛 속에 놓인 채 잠에서 깨고, 그 특유의 덤덤한 시간을 잘..
첫 달, 누드모델 일만으로 낸 수익은 40만 원 남짓이었다. 여기서 당시 거주하던 지역과 서울에 있는 화실의 왕복 비용을 빼면 30만 원 정도가 되었다. 물론 이 비용으로만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고, 당시에는 영상을 기획하거나 제작하는 외주 일을 받아다가 하고 있었다. 이 일만으로도 나는 먹고살며 학비를 내고 저금도 약간할 수 있을 만큼 수익을 냈다. 다만 일주일에 이틀이나 사흘 정도는 일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잠을 잘 수 없었고, 기계적으로 영상을 찍어 내는 일은 단순 작업과 별 차이 없이 지루했다. 영상도 분명 처음에는 좋아서 시작한 놀이였는데 일이 되고 나니 타성에 젖었다. 나는 업무 외 시간에 책을 읽거나 공연을 보고 싶기도 했고, 글을 쓰고 싶었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러나 잠잘 시간도 ..
거울 앞에 서서 천천히 몸을 본다. 몸을 관찰하는 방법도 모르기 때문에 노력해도 세심하게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30분 정도 꼼꼼히 시간을 들여 발가락부터 이마까지, 뒷모습도 관찰한다. 시선이 떨어지는 곳마다 몸의 일부가 잔영으로 맺힌다. 근육선 하나 없이 마른 몸이다. 말랐다, 안쓰럽다, 그것이 내가 최초로 나의 몸에게 느낀 인상이다. 누드모델 일을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가장 처음 한 일은 몸을 관찰하는 일이었다. 몸에 소홀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결점으로 새겨져 있었다. 자해를 처음 한 열아홉 살, 갑자기 체중이 늘었던 열다섯 살, 다친 다리에 대한 기억. 몸을 되찾으려 고군분투한 기간들도 거기에 있었다. 몸을 관찰하는 일은 그간 몸에 새겨진 시간들을 감각하는 일이었다. 내 몸..
매일 복용해야 하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그래도 프리페민은 경구피임약보다는 복용이 쉬웠다. 경구 피임약은 매일, 같은 시간에 먹어야 하지만 프리페민은 매일 먹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게 꼬박꼬박 2주 정도를 복용하자 생리 때에만 잠깐 비치던 화농성 여드름이 턱과 입가로부터 시작해 볼 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하고, 얼굴에 무언가가 닿으면 화끈거리며 아플 정도로 피부가 예민해졌다. 프리페민 부작용이었다. 얼굴이 얼룩덜룩 붉어지니 화장을 했을 때도 낯빛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자꾸만 아프냐, 피곤하냐, 얼굴에 뭐가 묻었느냐, 피부가 탔느냐, 그런 것을 물었다. PMS 없는 쾌적하고 건강한 나날에 대한 기대는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프리페민에 대한 배신감까지 느꼈다. 너를 믿었는데! 웹 서치로 찾아 본..
끔찍한 장마가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직업적인 문제로 온갖 관절과 근육에 통증을 매달고 사는데 장마가 시작되니 급기야는 아침마다 온몸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염분과 수분 섭취를 제한하고 꼬박꼬박 스트레칭을 해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주먹을 쥘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들에 퉁퉁하게 부종이 올랐다. 그런 손을 내려 발목을 쥐면, 발목이 통상 두께보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 두꺼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붓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몸이 부어올랐을 때 몸에 힘을 제대로 줄 수 없다는 것과, 이런 식의 부어오름은 보통 열감과 통증과 무기력감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샤워를 할 때 뜨거운 물을 오래 끼얹어 혈액 순환을 돕고, 수분 섭취량을 제한하고, 붓기가 염증이 되지 않도록 꼬박꼬박 소염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