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로 떠난 아이 나를 포함하여, 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편부모 가족의 가슴 따뜻한 성장 서사, 벅차게 흘러가는 영상들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하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겼던 장면은 철창 안에 갇힌 늑대를 홀로 바라보던 둘째 아메의 뒷모습이었다. 늑대가 있는 쪽은 환한 빛으로 가득하고, 아이가 선 쪽은 철창과 같이 어둡다. 갇혀 있는 쪽은 늑대인데, 그 앞에 선 소년이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늑대와 인간의 혼종으로 태어난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왜 동화 속 늑대는 항상 나쁘게 묘사되는지 의문스러워했다. 성장의 기로에 서서 무엇으로 자라야 할지 알 수 없는 아이는 인간..
리부트 은 많은 연작은 다 무시하고 원작 할로윈(1978)의 사건 이후의 이야기다.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할 수는 없으나 전복의 의미가 매우 유의미한 작품이다. 여자가 공포영화 좋아하는 게 어때서? 어린 시절에는 겁이 많아서 매일 자기 전 무서운 꿈을 꾸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혼자 화장실을 가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무서운 이야기나 영화를 즐겨봤다. 그리고 이제는 즐기는 장르가 되었다. 공포영화나 B급 장르 영화를 재밌어 하다 보니 이상하게 보는 시선을 받기도 했는데 내가 ‘여자’라서 더 신기해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부끄러움 없이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여성들은 숨기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도 재미있는데도 ‘내가 이런..
사실 우울을 화두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다. 누군가에게 우울은 분명히 질병일 것이다. 진료에 따른 상담과 복약으로 많은 부분 도움을 받고 더 편안하게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에게 치료 자체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온 이 글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모든 글은, 아무리 적게 읽혀도 결국 읽힌 이들에게 영향을 행사한다. 이 글 때문에 치료를 진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더 힘든 상황에 놓이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법은 없다. 그런 분들에게 우선 말하고 싶다. 치료로 효과를 보고 있다면 치료를 지속하시라고. 당신의 방법이 당신에게 가장 최선이며, 당신은 이 글 때문에 불필요한 의문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이 ..
이번에 공개하는 글은 사실 같은 제목으로 쓰는 두 번째 글이다. 첫 글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마감이 이틀 남은 시점에 다시 원고를 하고 있다. 첫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이번에는 우울에 대해 쓰자고 스스로 정해 놓고도 ‘내 우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거나,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우울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상대방을 납득 시키는 과정이 매번 껄끄럽고 숨 막히는 일이기는 했지만, 내가 이 화두 앞에서 이만큼이나 비겁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근데 나는 글을 쓰고 있을 당시에는 정말로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왜 원고를 하는 내내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고 손이 멈추는지 몰랐다.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썼던 ..
1, 2편을 다시 읽어보니 ‘젠더’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앞서는 성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다가 젠더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도입을 쓸 때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혹은 사랑하는 감정이 생겨서 관계를 만들어가는 문제는 너무도 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적인 관계의 두 사람은 숟가락/젓가락처럼 동등한 위치에 있으니 ‘성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갑자기 ‘남성, 여성의 구분은 젠더 문제잖아!’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성별 대신 젠더를 의식적으로 쓰기 시작하자 알 수 없는 불편함과 꺼림칙함이 끼어들었다. 이 꺼림칙함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성/남성을 성별로 표현할 때와 젠더로 표현할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몇몇 문장을 통해 생각해 봤다. “나는 ..
사랑의 발명 한쪽 날개를 가진 소년이 대기실에 앉아 있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떠나고 대기자 명단을 확인하고 예약을 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파손된 물건을 가져온다. 전에는 효험이 있었으나 이젠 듣지 않는 약. 사랑하지만 죽어 썩어가는 애완동물의 시신. 수많은 결혼생활이 부서져 발명된 물건들의 발명가에게서 수리를 기다린다. 그는 페니실린과 프로작을 발명했고 습포제, 부위, 인공 수족을 만들어내는 것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결혼은 사실 그의 첫 번째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상담사나 애완동물 애호가, 소생술사, 약리학자로 여기지 않는다. 가끔 비서를 시켜 사람들을 죄다 대기실 밖으로 몰아내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와, 자판기 안 음료수 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
적응할 수 없는 사회 이 영화는 한 여성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쿠미코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 사회 부적응자로 주로 이야기된다. 쿠미코가 일하는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그는 회사에서 연차가 좀 쌓인 직원으로 보인다. 사장은 수시로 쿠미코를 불러 차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물론, 퇴근 후 자신의 양복을 세탁소에 맡기거나 부인에게 줄 결혼기념일 선물을 사 오도록 지시한다. 쿠미코는 사장에게 줄 차를 끓인 뒤 침을 뱉을까 말까 고민하다 황급히 침을 삼키기도 한다. 그에겐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일 것이다. 그에게 무기력은 일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은 지각한 쿠미코를 불러 앉혀놓고 묻는다. 자네 나이가 몇이지? 이제 슬슬 나갈 때가 되지 않았나? 사장은 노골..
온전히 생존기를 연재한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습니다. 두 달 동안 다섯 개의 이야기를 했고, 열 편의 글을 썼습니다. 다섯 개의 이야기마다 궤적에 쉬는 선을 하나씩 그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지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며, 글감이 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버린 어떤 감각 산물들에 대한 애정입니다. 일기 쓰듯 일상의 편린을 눌러 담아 둔 몇 개의 문장을 공개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아침. 나의 방은 해가 떠 있는 시간 중 아침이 가장 어둡다. 아침의 해는 부엌 테이블 자리에 양껏 빛과 열을 끼얹고는,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시간에 잠깐 내 방에 들러 쉬다 간다. 나는 언제나 평이하고 덤덤한 빛 속에 놓인 채 잠에서 깨고, 그 특유의 덤덤한 시간을 잘..
언젠간 하게 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되도록 천천히, 언젠가는. 그러나 생각보다 조금 빠르게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나의 우울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이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으니까. 내 우울을 따라오고 내 우울을 이끄는 이야기, 나의 경험이자 비밀이었던 이야기. 나를 생각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드는 친구이자 가장 큰 적. 나의 숙제.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 16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떤 부분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이제는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 나는 성폭행 피해자다. 폭력은 늘 일방적이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듯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바라보고 물건으로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국어사전이나 교과서 등의 가르침에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폭력의 이미지만이 그려져 있다. 주먹..
언제부터 스스로 브라를 찾아 입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노브라로 등교하는 나에게 아침마다 엄마는 아동용 스포츠 브라를 현관까지 들고나와 흔들었다. 학교 가는 것은 좋았지만 등교 시간은 지긋지긋했다. 겨울에는 그나마 방한용으로 괜찮았지만 쉬는 시간 틈틈이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여름에 몸에 무언가를 더 하나 걸치는 것이 아주 싫었다. 어쩌다 입고 나오는 날이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몸을 티셔츠 안으로 꼬깃꼬깃 접어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후딱 벗어 가방에 넣었다. 나는 복도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정신없는 초딩이었기 때문에 스포츠 브라를 입으면 왠지 머리가 잘린 삼손이 된 듯 힘이 빠졌다. 하루는 점심시간 축구 경기 중에 공을 두고 몸싸움을 하다가 넘어졌다. 나는 짜증이 났지만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