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자유가 있으리라. 하지만 자유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한 나는 많은 통제와 구속 안에 있기도 하다. 그것은 내 안의 자유를 인지하기 전부터 지속되어온 관습적인 측면이다. 이미 뿌리내린 것을 뽑아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런 어지러운 정원에는 전문 정원사를 두면 딱 좋겠지. 좋은 건물을 구경할 때면 언제나 따라오는 훌륭한 조경처럼 멋지게 가꾸는 거야. 그러나 곧 나의 정원에는 조경 업체가 낄 만한 예산이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씁쓸하게 피어오른다. 내게 있는 통제라는 식물, 그것은 잎사귀의 테두리를 따라 미세하면서도 날카로운 가시를 가져 장갑 없이는 함부로 다듬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장갑은 나만이 만들 수 있다. 모든 이들의 정원에는 각..
오늘도 그분이 도서관에 오셨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잔뜩 모은 미간이 오늘은 더 깊어 보인다.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 날마다는 아니지만 2주일 전쯤부터 한 여성이 수험서를 잔뜩 짊어지고 도서관을 찾았다. 어린이도서관은 따로 열람실이 없고 둥글고 넓은 모서리를 가진 커다란 개방형 책상 세 개가 자료실과 어우러져 놓여 있었다. 오전엔 아직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니지 않는 영유아와 보호자 들이 북스타트 후속모임을 하거나 책을 빌리고 열람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1층엔 장난감 도서관, 2층엔 어린이도서관으로 꾸려져서 1층보다는 2층이 공간도 여유가 있고 조용했다. 그래도 어린이도서관답게 이용자가 몇 명만 와도 금세 활기가 돌았다. 이때 균형을 맞추는 게 필요하다. 어디까지 소음(이걸 소음이라고 부를..
나의 이십대는 그랬다. 내면의 방황이 깊어질수록 가야할 곳과 해야 할 것이 늘어났다. 내가 어느 정도 선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어떤 일이든 너무 무리했고, 자주 번아웃을 겪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끝내 번아웃을 겪는다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하루에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삶은 언제 끝나지?’ 한 톨의 아쉬운 것도 아끼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없다는 듯이. 나에 대한 소중함, 나를 아껴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 그런 것들이 모두 멸종해버린 일종의 ‘정서적 아포칼립스’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주어진 명이 아직 남아있는 것일까, 나의 삶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끝내 죽는 것보다는 살아서 새로운 길을 걸었다. 나는 자연의 ..
맨 처음 어린이도서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눈에 띈 건,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웰컴 공간의 북큐레이션이었다. 공룡에 관한 다양한 책들이 기다란 나무 탁자 위 미니 이젤에 보기 좋게 비치되어 있고, 책 속에 등장하는 공룡들을 확대 복사한 그림들이 나름의 흐름을 가지고 벽과 창문에 입체적으로 붙어 있었다. 군데군데 아이들이 그린 듯한 그림들도 있었는데 책 속 그림들과 묘하게 어우러져 신선한 풍경을 연출했다. 책 속에서 튀어나온 공룡들이 나를 맞아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중 티렉스가 커다란 이빨을 번쩍거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낸다. - 어서 와. 이곳은 처음이지? 긴장할 거 없어. 너를 맞으러 우리가 문 앞까지 나온 거니까. 익룡이 내 머리 위를 날며 새로운 세계에, 놀라운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며 날개..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응원했다. 물론 면전에 대고 네 수준에 무슨 연재를 하느냐고 말할 수는 없겠지. 하하. 하지만 나도 사람이다.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들 내 도전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그러니 여러분, 나처럼 똥을 싸라. 농담이고, 시도를 해봐라. 뭐든지 일단 해야 한다. 혹시라도 나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고 늘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다면, 또는 우울증에 오래 시달렸다거나 만성 불안으로 일상생활에서조차 어려움이 있다면, 내가 지금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게 뭔지를 꼭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저런 의심, 부정적인 생각이 피어오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 재미있을 것 같고, 기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놓치지 말아야..
더운 여름날이었다. 출장을 갔다가 시원한 도서관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총총총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왼쪽 200미터쯤 옆 시야에 학교 뒷문 담을 넘는 몇 명의 사람들이 포착됐다. 휙~!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학교 담을 넘는 건 그냥 사람들이 아니었다. 늘 나와 도서관에서 투덕거리고 실랑이를 벌이며 반성문도 벌써 몇 장씩이나 쓴 남자 아이들 무리였다.(사실, 반성문이라기보단 편지에 가까웠다. 이용 규칙을 심하게 어길 때마다 사서 샘에게 편지 쓰기 벌칙이 있었다.) 멀쩡한 정문을 놔두고 왜 뒷문 담을 넘고 있는 건지! 혹시 땡땡이?! 땡땡이치는 게 확실해! 오지랖이 발동했다. 난 발길을 돌려 총초총초총초총총 더 빠른 걸음으로 아이들을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아이들은 내 표정 같은 건 못 본 건..
종종 내가 쓴 글들을 읽어보려다 실패한다. 모든 글이 결국 내가 붙들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달콤 쌉쌀한 꿈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의 서툰 몸부림을 마주하는 것이 아직은 어려운 탓이다. 공개적인 곳에 무언가를 쓴다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일면 좀 미친(?)구석이 있는 것 같다.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호기롭게 내 어린 시절의 치부라면 치부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잔뜩 써내려갔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요즘 매일같이 이런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야?’라거나 ‘얘는 뭔데 글을 써?’ 혹은 ‘자아비대증 말기로군.’ 같은 식으로 나를 비웃을까 봐 두렵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 자신에게 이런 말도 자주 한다. ‘예..
사서의 역할 중 하나는 좋은 책을 소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럼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좋은 이야기가 담긴 글일 것이다. 그럼 좋은 이야기란 무엇일까? 이 질문의 대답에 관해서는 아주 오래 전 권정생 선생님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고 싶다. 권정생 선생님은 살아생전에 이런 말을 남기셨다. “동화가 왜 그렇게 어둡냐고요? 그게 진실이기에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지요. 좋은 글은 읽고 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이 인터뷰를 접한 이후로 좋은 글은 곧 불편한 글이란 등식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지금 소개하는 책 역시 이런 불편함이 점령하고 있으며, 내 삶의 불편함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로 삶을 치유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내용은 무겁고 아프지만, 기꺼운 마음으..
어린이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이다. 그중 아이들과의 만남은 당연하게도 나를 어린 시절로 데리고 간다. 지금의 어린이들을 보면서 내 안의 어린이를 바라보는 건 참 이상한 기분이 든다. 보통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는 건 마음이 순수해지고 어려진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외려 늙은이가 된 것처럼 마음이 고단해진다. 그런데 이런 고단한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이 얼마 전 ‘찾아왔다.’ ‘있었다’라고 하지 않고, ‘찾아왔다’라고 한 건 그만큼 그 사건이, 그 한마디 질문이, 운명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날마다 도서관에 오는, 나보다 두 살 위인 운영위원님이 있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돼 여자 형제가 없는 내게 그녀는 친정언니 같은 존재가 되었고, 그러다 그 언니 집에서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