삵에게는 거울 속에 놓고 온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어떤 일 때문에 주로 우울한 것 같아요?” 뭐 이런 질문이 있나 싶었다. 우울에도 이유가 있나? 이유가 있어서 우울한 사람들도 병원을 찾아 오는구나 싶었다. “존재요. 제 존재적 문제로 우울한 것 같아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유 없는 우울. 반복적인 자살 충동. 의사는 제법 말을 차분하게 이어가고 나의 고통을 토로하지 않는 내 모습에 약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자살 충동 이야기를 하자 바로 약을 처방해주었다. 항우울제와 항불안제, 충동조절제 등을 처방 받고 약을 먹기 시작하자 마치 안경을 낀 듯 세상이 선명해졌다. 이게 아프지 않은 나의 세상이구나. 내게 병원을 추천해 준 친구는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으면 아프지 않은 상태를 알 ..
결혼 내 남편은 요리 프로와 건물 프로, 디스커버리 채널, 수술 채널을 즐겨 본다.어젯밤 그는 우리에게 응급실에 실려 온 한 남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자는 두개골과 뇌가 단검에 관통당한 상태였다.칼은 빼낸 거야? 우리는 일제히 물었다.빼냈지. 다행히 남자는 멀쩡했는데 칼날이 정확히 두 반구 사이로 들어가 절단되진 않았지.대체 누가 그의 머리에 칼을 찔러 넣은 거야? 그의 부인이.그 여자 힘 좋네, 누군가 말했다. 다들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필 譯)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이 있는데 섬뜩하군요. 방심하고 읽다가 우리도 한방 찔린 듯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곧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위급 상황이 유머로 바뀌는 지점에는 듣고 있는 사람들의 선명한 리액션이 있습니다. 마리 하우의 시는 일상생활과..
1. 장미란도 “남자”한테는 당연히 진다. 옆 테이블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힘 센 여자=장미란도 “남자”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총 326kg의 기록을 세운 장미란은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에게 무조건 진다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남자는 무엇일까. 실체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납작한 강자와 약자의 도식을 공공장소에서 무방비 상태로 듣고 말았다. 어떻게 저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과연 ‘모든 남자한테 진다’라는 말처럼 ‘나에게도 진다’라는 말도 감히 할 수 있을까. “남자”라는 기표에 은근히 자신을 포함 시키면서 여성을 객체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주체성을 획득하는 모습은 아마 우리에게 익숙할 것이다. 이브 세..
흔히 여러 가지의 해석이 쏟아지는 작품이 잘 만든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다양한 논의를 가능케 하고 너도 나도 다르게 해석하면서 화제에 오를수록 남들 하는 건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반도의 민족에게 있어 필연적으로 이러한 이슈는 곧 ‘돈’이 되기 때문에 일종의 입소문 마케팅과 맥락이 같다고 볼 수 있겠다. 일찍이 나홍진 감독은 을 일부러 여러 갈래로 해석되어 논란이 될 수 있도록 결말을 모호하게 연출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불친절한 영화’는 흥행 요소일 수 있을까? 수많은 예술 영화들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이 불친절하지만 그 때문에 외면당하는 걸 보면 또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함량미달의 깜냥으로 한 번 유추해 보자면 당연히 재미있어야 하고 시대상을 반영하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동시..
나는 때때로 관계에 대해 바라는 것이 지나치게 많았음을 고백한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연인들에 대해 대체로 많은 것을 수용하는 좋은 연인이었고 그것을 담보 삼아 내가 받고자 하는 것을 연인에게 달라고 요구하며 관계를 맺거나, 파탄 내거나, 주도해갔다. 그런 요구에 목줄 메인 개처럼 끌려다니던 연인들은 언제나 너무 빨리 지쳐버리곤 했다. 지친 그들이 가장 손쉽게 취하는 방법은 이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해를 포기하면 나는 ‘그래, 네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 너는 그냥 개인데.’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놓아주었다. 그들은 관계의 일부분에서 그들 스스로가 그런 취급을 받은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는 나의 놓음에 쫓겨 사라졌다.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당시의 연인이던 W에게 과거 있었던 일을 아주 어렵게 털..
결혼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왜 별별 이유를 다 붙여서 결혼 안 해! 라고 외치는 것일까. 찬찬히 들여다보니 사실은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었다. 애인과 데이트를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마다 같은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지기 싫었다. 사회인이다 보니 주중에는 바빠서 주말에 겨우 만날 수 있는데 그조차 각자 약속이 있으면 만날 시간이 더 줄었다. 주중에도 볼 수 있었으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가는 곳에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보고 싶을 때만이 아닌 싸울 때도 그랬다. 전화로, 텍스트 메시지로 소통하다가 다툴 때가 있는데 바로 옆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더라면 싸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결국 결..
윤석남의 , 1995년 작. 삼십대 초반, 한창 첫 그림책 작업을 하던 나는 정오 무렵, 영화를 보러 갔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부가 견딜 수 없는 불안과 우울 속에 아이를 맡기고 혼자 호텔로 가서 약을 삼킨다. 호텔 침대 위에 누운 여자와 온 방에 차오르던 물, 그 속에 고요히 누워있던 여자의 이미지가 지금도 또렷하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맡길 아이도 없는 나였지만 그녀가 왜 그러는지 그냥 알 것 같았다. 당시 작업 중이던 그림책의 출간은 미정이었고, 밤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문득 문득 이게 허망한 짓은 아닌지 자주 의심했다. 내게 재능은 있는지, 그림이 밥벌이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도 작업을 놓지 못했다. 나는 존재 증명에 목마른 애처로운 삼십대였다. 영화는 인기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이거나 먹어라, 세상아! 영화는 이니드와 레베카가 졸업식장을 뛰어 나와 학사모를 집어 던지고 학교를 향해 쌍뻐큐를 날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니드가 졸업을 해서 아쉬워하는 건 찌질한 데니스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이니드와 레베카는 우선 돈을 모아 독립해서 같이 사는 것을 제1목표로 삼는다. 서로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둘은 졸업식을 기점으로 점차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다. 졸업식은 했지만 이니드는 학교에 남아 마지막 미술 수업을 들어야 했고, 레베카는 곧바로 까페에 취직하게 된다. 둘의 각기 다른 행보는 그들이 입는 옷에서도 드러나는데, 영화 내내 이니드는 이전과 같이 옷이나 머리를 통해 변덕스러운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사회인이 된 레베카는 중반부터 깔끔..
주변인들에게 이를 털어놓아야 할까, 털어놓는다면 누구에게 먼저 이야기해야 할까 등을 고민하며 일상을 지킨 지 한두 달여가 되어가던 어느 날, 우연히 다니던 대학 내의 상담실 홍보간행물을 보고 상담 치료를 시작할 마음을 먹었다. 당시의 나는 학교를 늦게 복학해 마저 다니느라 삶의 터전을 꾸려 놓았던 서울로부터 홀로 떨어져 먼 지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오전과 오후 시간에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오후 늦은 시간부터 새벽 늦게까지는 영상 기획이나 편집 작업을 하여 생계를 꾸리고, 주말에는 누드모델로 일하거나 앞선 화에서 말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거나 당시에 교제하던 남자친구를 만났다. 사방에 낯선 타인들만이 가득했다. 규칙적이고 피로하고 목가적인 나날의 연속에서, 어디에도 털어놓고 의논할 곳이 없..
나에게 관계다운 인간관계가 생긴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관계라기보다는 누군가와 얽혀있는 삶을 살았다. 더 이전엔 지나치게 격리된 삶을 살았는데, 격리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누군가를 내 옆에 얽어놓고 눌러 앉히려 했던 시간이 거의 10여 년쯤 된다. 동아줄처럼 붙잡고서 서로 도무지 놓아줄 줄 모르던 그때.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끊임없이 홀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욕망만 키워 가던 그때.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온 시간들. 10년을 그렇게 살다가 홀로서기를 시작하니 그제야 관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격리됐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내게 무척 힘든 일이다. 물리적 격리는 아니었고 말하자면 정신적인 격리였는데, 나 스스로 나를 가뒀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