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으로 지탱하는 삶 마츠코는 언제나 타인의 구원이란 환상 속에서 살았다. 마츠코는 어렸을 적 몸이 아픈 여동생에게 각별한 애정을 주는 아버지 밑에서 애정에 대한 결핍을 느끼며 자란다. 아버지의 미소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땐 좌절하며 한편으론 여동생에 대한 증오심도 키워간다. 중학교 교사가 되어서 학생의 도난 사건에 휘말리며 마츠코의 일생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한다. 학생의 잘못을 덮어주기 위해 자신이 돈을 훔쳤다며 가게 주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학교에는 모든 사건이 가게 주인의 오해였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함께 거짓말을 계획했던 한 선생의 배신으로 마츠코에게 모든 잘못이 뒤집어 씌여지고 마츠코는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마츠코는 아버지의 애정을 받기 위해 애처롭게 노력했..
요즘 하는 생각 요즘에는 몸을 ‘지니고’ 산다는 생각을 많이 생각해요. 처음에는 몸을 ‘데리고’ 혹은 몸에 ‘이끌려’ 산다고 생각했어요. 의지와 상관없이 새벽에 출근해야 할 때, 편의점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면 특히 이런 생각이 짙어졌죠. 내가 힘들지 않아야 몸을 건강히 살필 수 있는 것인지, 몸이 건강해야 나도 힘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전자가 몸을 ‘데리고’ 사는 것일 테고, 후자가 몸에 ‘이끌려’ 사는 것일 텐데… 그러다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몸인가 정신인가, 무엇이 우선인가, 우선을 논할 수 없는 것인가? 둘 다인가? 이러한 논의에 관련된 여러 도서를 읽고 싶었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아쉽게도 도서관이 휴관 중이네요. 허허, 너..
크게 싸운 날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소통에 대한 확신의 부족으로 시작된 다툼이었다. 다툼 끝에 오빠가 내게 제안했다. 커플 다이어리 정말로 써 보는 게 어떻냐고. 지나가는 말로 커플 다이어리에 대해 오빠에게 이야기했었는데 오빠가 그걸 기억하고 제안해온 것이다. 내가 제안할 때는 막연한 것이었지만 큰 다툼과 화해 끝의 제안은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말과 서로에 대해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들을 정리해보는 것. 그리고 기억하는 것. 우리가 다이어리를 채우는 방식은 이러하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각자의 입장을 써 보는 것. 주제는 다양하다. 관점, 만남, 섹시함, 권태 등등. 따로 쓰기도 하고 같은 공간에서 같이 쓰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의 다이어리를 나눠보며 다이어리보다..
카페에 가면 애인과 나는 묘한 공방전을 시작한다. 옆자리에 앉으려는 나를 피해 애인은 건너편에 앉는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소파 옆자리를 퉁퉁 치며 ‘여기 앉아요, 여기’ 라고 말하지만 애인은 그런 나를 무시한다. 내가 일어나서 애인 옆으로 옮겨가면 반대편으로 도망간다. 옆에 앉기를 격렬하게 거부할 때마다 나는 다른 테이블의 커플을 가리키며 보라고 했다. 나란히 앉아 한 몸으로 얽혀 서로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고 있는 이성애 커플들을 말이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러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그들을 불편해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심통이 잔뜩 나서 ‘왜 우리는 안돼요?’ 라고 포효했다. 카페뿐만 아니라 식당, 공원 등 데이트 장소라는 분위기가 풍기는 모든 곳에서 그랬다.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표현은 ..
레모네이드 손님 무덥던 여름날, 가게에 젊은 여성이 들어와 길을 물었다. 어눌한 한국말이지만 발음만큼은 정확하다. 특히 ‘~요’라는 어미를 분명하게 발음해냈다. 그녀가 물어본 상호는 근처에 있는 닭 가공 공장의 이름이었다. 생긋 웃어 보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그녀는 또다시 뙤약볕 속으로 사라졌다. 삼십 분이나 지났을까. 그녀가 또다시 매장을 찾았다. 내내 무례한 태도로 담배를 달라는 아저씨들만 보다가 생긋 웃으며 레모네이드를 주문하는 그녀를 다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그녀는 몽골 사람이다. 네팔, 중국 상하이, 미국 동부와 남부 그리고 몽골. 내가 밟아 본 이국 땅인데, 이 모든 일정을 ‘여행’이라 표현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싶다. 모름지기 여행이라면 원하는 사람과 함께, 계획이든 즉흥..
영화 의 제목 중 ‘하’라는 음절이 내게 처음 준 첫인상은, 참 밝았다. 그 밝음의 이미지와 영화 포스터에서의 역동적인 주인공 프란시스의 모습을 영화 내내 보면서, 좋은 느낌이 내게 전달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의외로 영화는 매우 현실적이었다. 그럼에도 엔딩은 행복하게 끝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영화가 전개됐던 내용보다 더 지극히 현실적이고 덤덤해서 의외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상황이나 성격이 나와 하나하나 공감이 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잘 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 영화 의 주인공 프란시스가 바로 그랬다. 그가 정말 잘 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지만, 동시에 너무 멀기도 했다. 프란시스는 몇 년 동안 무용단에 소속되어 있어도 공연에서는..
삵은 사랑의 힘을 믿었다. 누군가 내게 그랬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아마도 내가 가진 사랑의 방식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겪은 사랑이란 사랑에 나를 던진 시간이었다. 사랑에 자신을 던지는 건 미련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라고 온 세상이 외치는 지금이지만 나는 사랑에 나를 던졌다. 나를 걸었고 나를 채웠으며 나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또 받아들인 세 번의 사랑. 추락하던 나를 상대로 채운 사랑, 서로를 채웠고 또 서로를 놓아준 사랑, 서로를 알아보고 받아들였고 이제는 서로를 이해해가려는 사랑. 세 번의 사랑은 나를 뒤 흔들어 놓았고 바꿔 놓았으며 또 나를 찾게 해 주었다. 사랑에 나를 던진다는 것은 쿨한 사랑과는 대척점에 있다. 나는 사람 자체가 쿨하..
몸의 난조로 몇 주를 앓았다. 지금은 회복 중이다. 근래의 몇 주 중 오늘이 가장 선명하다. 이 정도라면 다시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또 쓰기를 시작한다. 일주일은 속탈이 나서 위염과 장염을 동시에 앓았고, 달팽이 같은 속도로 몸을 회복하던 차에 어디에선가 독감을 얻어 또 2주 남짓을 앓았다. 침대에 돌멩이처럼 고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온종일 누워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소리가 너무 크구나, 떨어지지 않는 열에 휩싸인 채로. 눈꺼풀이 뜨겁게 떨리는구나, 하다가, 간신히 일어나서는 과일이나 시리얼 같은 것으로 끼니를 챙기고, 약을 삼키고,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감으러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억지로 눈을 뜨면 세상이 눈 안쪽으로 쏟아지는 것처럼..
사람이 꽤 붐비는 길거리였다. 우리보다 조금 앞서가는 남녀 커플이 거의 껴안다시피 걸어가고 있었다. 딱히 관찰하려는 게 아니고 두 걸음도 안 되는 앞에 있어서 보였을 뿐이었다. 핑크빛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점점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프렌치키스를 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옆에 있는 애인을 바라봤다. “우리도 뽀뽀해요!” 애인에 따르면 공공장소에서 나는 명실공히 트러블메이커다. 우리 관계가 깊어진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무렵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한창 흥행했다. 영화를 보러갔는데 사람이 꽉 찬 300석이 넘는 영화관에서 우리의 자리는 중간 복도 끝이었다. 내 옆은 복도였고 애인의 옆에는 우리와 나이대가 비슷한 여성과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앉아있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나는 의자 걸이..
미용실 투블럭으로 잘라달라는 나의 요청에 미용사가 조심스럽게 되물어 왔다. “실연 당한 거는… 아니죠?” “아니에요, 더워서 짧게 자르려고요. 버킷리스트이기도 했고요.” 겸연쩍게 웃어넘기며 대답했지만 사실 어떠한 결정적인 이유를 갖고 투블럭을 결정한 건 아니다. 그저 무더운 여름 더위에 긴 시간 머리 말리는 게 곤욕으로 느껴진 게 투블럭 유혹의 시작이랄까.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머리카락이야 또 자라니 뭐. 그런데 긴 머리는 댕강 묶으면 그만이지만 짧은 머리는 손질이 힘들 텐데. 밤에 감고 잤다가 아침에 뻗치면? 흠, 머리는 밤에 감는 게 좋다는데. 게다가 매달 미용실 가서 정리하려면 긴 머리보다 돈도 더 들고. 무엇보다 투블럭이 안 어울리면 어떡하지? 되돌릴 수도 없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