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정수 검은 바닷속으로 몰래 사라진다면 어떨까 유례없이 꼼꼼한 계획을 세웠다. 나를 찾진 않겠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게. 나는 없지만 있는 듯하고 싶었다. 언제나 나는 죽음을 탐하고 죽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가만히 웃고 있으면 나는 사라졌다. 투명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담고 언제나 나쁜 것을 믿었고 내 진심은 거짓이 되었고 모든 감정을 당기고 밀어냈다. 내 믿음은 비었고 실망만 내 것이다. 함께 죽음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남겨진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나는 언제나 쓸쓸해 보였다. 나는 언제나 걸으면서 습관처럼 울었다. 거리에 하나들이 많을수록 크게 울었다. 늘 젖어 있는 텅 빈 손 그런데 내가 정말 하나였던 적이 있었어? 가만히 울음을 멈추고 다짐할 때마다..
Unexpressed emotions will never die.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They are buried alive and will come forth later in uglier ways. 산 채로 묻힌 뒤 훗날 더 추악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Sigmund Freud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을 꿨다. 어떤 남자가 벽을 따라 늘어선 키 높이의 풀들을 다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을 것이 있는 듯 주변을 서성거리며 우물우물 거린다. 앞에 선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남자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더니 대답 대신 다듬던 풀잎파리를 쥐고 확 잡아 뜯는다.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동시에 이 상황이 모두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꿈임에도 불구하고 가..
어릴 때 손바닥과 발바닥에 무엇인가 묻히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과자가 아무리 욕심나도 양껏 손으로 확 움켜쥐지 않았다. 대신 과자를 손끝으로 살짝 집어 올려 아주 빠른 속도로 먹는 건 자신 있었다. 그래야 동생보다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로션도 손바닥에 쭉 짜는 게 너무너무 싫어서 손등에 살짝 넘치지 않게 짜서는(양 조절이 관건이다. 만약 실패하면 물컹한 로션이 손바닥으로 침범하고 만다!) 고양이가 앞발로 얼굴을 세수하듯, 나도 손등으로 얼굴을 조심조심 문질렀더랬다. 그뿐인가. 샤워를 하거나 발을 씻고 나오면 물 묻은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싫어서 최대한 발 가장자리로만 체중을 싣고 뒤뚱뒤뚱 걸어서 간신히 내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가끔 샤워를 하고 나오거나 발을 씻고 나오면 그럴 때가..
마음작물 서정민주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돋아나는 철문 문짝 전문가가 방문해서 끼워주는 건 아니지만 마음 근육에 알아서 뿌리내리는 작물 소음에 강하지만 수다에는 약한 것이 심지이기에 수면 바지 입은 나와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근 나 둘은 실 전화기로 각자의 방 창문을 통해 대화한다. 💭 네가 하고 싶다고 해 🗣 나 떨리는데… 💭 마음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뭐 어쩌려고? 답답하다. 나 간다. 실 전화기를 단숨에 끊어버리고 은둔하는 마음 행동력이 필요할 때 다시 연락 오겠지마는 가오리 오리너구리 우리 강아지 비 어린이 비 부모집단에서도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금쪽같은 내 새끼 방공호 같은 문 뒤편에서 마음은 좋아하는 동물들과 뒹굴거리고 바질이랑 민트도 한 움큼씩 뜯어먹는데 외면의 이해심이 해처럼 드나들어서 따뜻..
지난 연재분에서 나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썼다. 친구의 가족사와 그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목격자로서 나의 책임에 관한 내용이었다. 민감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발행 전 친구에게 동의를 구해야 했다. 떨면서 카톡을 했다. 일단 내가 자살 사별과 애도에 관련된 내용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친구에게 말하고(나는 가까운 몇 명의 친구들에게만 이 연재의 존재를 알렸다.) 그 에세이에 본인의 이야기를 싣고 싶다고 제안해야 했다. 그 글에는 내가 차마 전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들어가 있었다.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글을 읽는 동안 나는 초조하게 이 일 저 일을 꺼내 들다 말았다. 두어 시간이 지나고 친구에게 답장이 왔다. 먼저 흔쾌히 글을 발행해도 좋다고 허락해줬고, 한 문장을 빼달라고 했다. 그것은 내가 수정이..
새로운 사람 김지현 아침 해가 뜨면 쩡-하고 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많던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갈라지는 소리였다 무너져 내린 사람의 입가에는 주름이 팼다 갈라진 얼굴을 타고 자잘하게 밥 먹은 흔적이 깊었다 견고한 덩어리 같던 사람은 매일 조금씩 자잘하게 부서져갔다 빙하를 닮은 비누에게 거품을 얻어다가 사람은 얼굴을 씻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문지르고 닦느라 알뜰하고 단단하던 비누가 차가운 물속으로 녹아 내렸다 사람은 말없이 얼굴을 씻었다 새로운 사람은 너무 많으니까 너무 많다는 것은 죄스럽기까지 하지만 다시 절실하게 얼어붙은 바다만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 드느라 둔한 허리를 굽히고 폈다 아침이 되면 사람은 대답처럼 세수를 했다 * 이 시는 희음이 기획..
“공예는 왜 연재를 하면 안 돼?” 친구 D의 물음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에세이 도전기. 그래, 만들고 쓰고 전부 다 해보자! 나는 (자칭)예술가 이밈달. 나름대로 복잡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긍정의 색채를 잃지 않는 타고난 예술형 인간이다. 스스로 이렇게 정의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모름지기 예술가의 삶이란 ‘표현’과 떼어놓을 수 없는 법. 나 역시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과 ‘표출’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다리기하며 살아왔다. 방황한 시간만큼 이래저래 발을 담군 곳이 많아 전문분야가 어디라고 특정하긴 어렵지만 편집디자인, 양초공예, 레진공예, 3D프린팅, 사진(포토아트) 등 여러 가지 것들을 두루두루 즐기고 있다. 지난 시간 나는 무엇을 만들든 ‘상처받은 나’에 잔뜩 취한 채 작업했다. 용광로 같..
벌레와 예술 혜수 아주 무더운 여름날, 매미가 우렁차게 울던 밤에 우리는 플래시를 들고 다니며 곤충 채집을 했다. 막 탈피한 매미 유충은 기이할 정도로 투명한 연둣빛을 띄면서 갓 태어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그 얇은 속살이 타버리지 않을까 먼지 많은 이곳에서 점점 질식하지 않을까 아니, 매미의 천적은 무엇이지 이런 걱정을 하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밤잠을 괴롭히는 매미 소음, 죽겠다, 괴롭다, 알고 보니 사람 탓 빛이 없는 밤이 돼야 울음을 그치는 매미가 가로등 때문에 낮인 줄 알고 계속 운다는 것이다. 플래시를 켜고 걷다 보니 나방들이 날아들었다. 나비보다 나방이 좋다는 나를 보며 칙칙한 걸 좋아한다고 핀잔을 주는 너는 사마귀를 가장 좋아하는데 예전에 길을 건너다 차에 깔려 죽은 사..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찾는 단어는 ‘연결감’이다. ‘쓰는’ 대신 ‘찾는’이라고 한 건, 말 그대로 내가 이 단어를 찾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여러 상황에서 굳이 ‘연결감’이란 단어를 찾아 불러본다. 또 ‘연결감’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단어를 쉬이 무시하지 않고 아끼고 싶은 마음에서이기도 하다. 어떤 책 제목의 부제처럼 ‘어휘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내 세계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고 싶어 이 단어를 ‘마구’ 갖다 붙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러면 어떤가. 요즘 이 말처럼 나를 착 달라붙게 하는 말은 없다. 이 말을 찾아 굳이 명명할 때면 난 삶에 착 달라붙어 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수많은 연결 속에, 그 핵심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마 전 출간된 정혜윤 ..
쓰고 있는 말 홍지연 10년 전 일기에서 쪽지를 발견했다 빛바랜 종이 한 장에 꾸역꾸역 쓴 쏟아질 것 같은 글씨 그날부터 계속하고 있는 너의 말 의연에게 내가 너에게 보내는 말과 네가 받아서 읽는 말의 시간차에 대해 생각해 모든 게 깨어나는 새벽에 근심과 걱정을 담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이 말이 너에게 닿을 때는 모든 일들이 일어난 다음일까? 쉬지 않고 죽어가는 나무들에 대해 생각해 너무 더운 아니 너무 추운 날씨에 대해서도 집을 잃은 철새들에 대해서도 차라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어항 속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물이 새어나가는 어항 속이라고 그럼 온몸을 끼워 맞춰서라도 틀어막을 텐데 네가 이 글을 읽을 때, 이미 벌어진 막지 못한 일들에 대해 생각해 아니 막지 않은 거겠지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