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임금노예의 노예에서 자연의 동지로 옆에 서다” 18세기 이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인권과 기회의 평등을 주장해왔고, 가부장제라는 구조적 성차별 체계를 분석하고 비판해왔으며, 사회적 조건과 조응해 구축되는 정신구조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특정 심리와 욕망이 낳는 여성혐오를 분석해왔고, 문화 문제만큼 경제 문제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고용, 임금, 성별화된 분업 및 차별 등에 주목하여 여성이 처한 부당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싸워왔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가 무엇보다 ‘가사 노동’이라는 성별화된 노동에 주목하고 ‘임금’ 요구를 통해 문제제기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녀 또한 자신의 싸움을 성별노동분업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선집 을 보면 달라 코스따가 197..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살다가 집 양쪽에 강이 흐르는 곳에 이사를 왔다. 매일 5km 정도를 걷고 뛰고 생각하고 사람을 관찰하기도 하며 2주가 지났다. 바다 근처에서 살 때는 기온 자체가 낮아 잘 껴입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단순한 옷차림으로 나가곤 했다. 하지만 강이 있는 도심은 달랐다. 건물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과 예측할 수 없는 기온 변화에 차라리 땀을 흘리는 게 낫겠지 하며 3월이 된 오늘도 두터운 옷을 입고 밖을 나섰다. 원래부터 달리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학창시절에 운동장을 반복해서 뛰어 기록을 재는 날이면 늘 이를 의미 없는 짓이라 투덜댔고, 뛰는 걸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매일 뛰고 있다. 현재의 나에게 달리기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이며, 나의 건강관리를 위해 ..
이 밤은 오래도록 밝을 거야 이 밤은 오래도록 밝을 거야, 길어지는 나날들, 경쾌한 하루의 소음은 흩어지고 사라지고, 밤이 보이지 않아서 놀란 나무들은, 하얀 밤에 깨어 있는 채로 머무르고 몽상한다… 무거운 황금빛 공기 중에서 밤나무들은, 그들만의 향수를 뿜어내고 펴 바르는 듯해. 사람들은 향기의 휴식을 방해할까 두려워서 감히 나아가려 하지도 부드러운 바람을 휘저으려고도 하지 않아. 도시에서 시작된 먼 바퀴 소리… 약한 산들바람이 일으킨 흙먼지는, 감싸고 있던 지치고 흔들리는 나무를 떠나며, 잔잔한 길거리로 서서히 다시금 내려앉는다. 우리는 그토록 꾸밈없고 자주 찾던 그 길을, 날마다 마음에 그리는 습관이 있어 그럼에도 생에서 어떤 것들은 변하고, 우린 다시는 이 밤의 영혼일 수 없을 거야… 원문링크 h..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자면, 한동안 어린아이가 싫다고 아주 공공연히 밝혔던 적이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면서 빽빽 울기만 해서 싫다는 이유로요. 버스나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칭얼대는 아이들을 보며 대놓고 인상을 쓰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성적 대상화를 큰 저항 없이 체화하곤 했던 명예남성(속된 말로 ‘흉자’라고도 하지요)이었던지라, 스스로가 약자를 혐오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낯선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한 몫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조카도 하나둘 생기고 친구들의 2세도 있어 아이들과 전에 비해 자주 접하게 되었지만, 그 흑역사 시기는 동생은 물론이거니와 사촌동생도 거의 없고 그야말로 주변에 저보다 어린 생명체가 전무하던 때였거든요..
“삐-삐-삐삐삐삐-삐” 현관 도어락 소리는 재미있고 특별하다. 문을 여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누르는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화장실이 급하다거나, 바깥이 너무 덥거나 추운 경우에는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거의 두 배로 빨라진다. 그래서 나는 도어락에서 나는 “삐-” 소리를 들으면, 저 사람이 누군지, 어떤 마음으로 집에 들어오는지 예상할 수 있다. 그날, 나는 자정 즈음이 되어서야 귀가하였다. 술을 살짝 걸친 상태라 취해 있었고, 그래서 비밀번호를 두어 번 틀렸다. 수자는 집에 들어선 나를 힐끔 바라보곤 버럭 소리쳤다. 서럽게도, 내가 취했거나 늦게 귀가해서가 이유는 아니었다. “윤희가 아직도 안 들어와! 이 기지배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수자는 근래 자주 늦게 귀가하는 윤희에게 화가 나 있던 상..
이제는 인정할 수 있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분리가 안 된 공간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조금의 분리가 필요하다. 처음에 이런 걸 알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몰랐다. 처음 같이 살 때는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일이 너무나도 좋아서 공간의 분리 같은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못했다. ‘함께 살고 싶어서 사는데 공간을 분리할 일이 뭐가 있겠어?’하고, ‘내가 선택한 가족인데!’하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엄청난 오해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나라는 사람은 공간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 고요한 침묵을 유유자적하게 즐겨야 하는 사람이 나였다. 이런 것을 알게 된 것은 애인인 알파카와의 싸움 때문이다. 우..
둘째아이 출산을 몇 주 앞두고, 6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 전 직장의 근무 햇수까지 포함하면 10년여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건 예감이 아니라 기정사실에 더 가까웠다. 전문직 종사자도 아닌 여성 노동자가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놓은 다음 자신의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 다니던 직장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어 적잖이 염증을 느끼던 차였다. 후련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막막했고, 걱정스러웠다. 전업주부 생활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두 아이의 성실한 엄마 노릇을 거뜬히 해낼 수 있을지. 무엇보다 사회적인 쓸모를 다한 것만 같은 내 스스로를 견딜 수 있을지가 가장 자신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집에만 있고 아이 둘만 바라보면서도, 모든..
아이보다 못한 어른 우리 대부분은, 같은 또래에 같은 성별을 가진 사람을 친구라 부르지 않나요? 친구가 별로 없는 나 말이 약간 느린 나는 모임 자리에 가면 별로 말을 하지 않는다 듣는 곳은 두 곳이요, 말하는 곳은 한 곳이라고 많이 듣고 말은 적게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말도 없이 잘 어울리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제주도의 9살짜리 동화작가 전이수라는 아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같은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모두가 친구라 하네 난 아이보다 못한 어른이라고 느꼈다 속이 좁은 나 생각이 짧은 나 친구를 많이 가지고 싶은 나 나이만 많이 먹어 욕심이 많은 나 부끄럽다 내일이 있다는 건 아픔의 어제 고통의 오늘 내일이 있다는 건 분명 희망의 빛이 있다는 것 어제의 ..
정수 님께, 정수 님, 설 연휴 잘 보내셨나요. 저는 근 반 년 만에 본가에 다녀왔어요. 오랜만에 산에도 오르고, 이제 곧 떠날 채비를 하는 백조들도 보았어요. 어떤 밤엔 동생과 긴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고요. 왜인지 뿌연 밤이었는데, 가로등 불빛 앞에 선 메마른 가지들이 생각나요. 산책 나온 사람도 거의 없어서 그 텅 빈 공간을 미친 듯이 달렸다면 아주 후련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요즘 저는 일상을 견디고 있어요.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될 때도 있지만, 때때로 이렇게 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이 깊숙이 밀려올 때가 있어요. 저를 둘러싼 환경이 영영 바뀌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 매일 경악스러운 뉴스가 쏟아져 나오지만, 저는 그저 정해진 일정대로 일상을 반복하고 있어요. 제가 밥을 먹고 ..
추운 새벽 2시 반쯤, 친구에게 메일을 쓰다가 문득 기억의 시작과 끝에 대한 생각을 했다. 주고받는 대화가 오랜만에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던, 그러나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는 이와의 첫 만남, 20군데 넘게 지원을 했으나 면접에서 계속 떨어져 온갖 스트레스에 허덕이다 취직한 회사에 처음 출근한 날의 긴장감, 매일 가는 슈퍼마켓에서 진열된 걸 구경만 했을 뿐 머릿속으로 맛을 상상만 하다 처음으로 구입해서 먹어본 감자과자를 입에 넣었을 때의 맛, 아마 이걸 기억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싶은, 내가 태어났을 때의 기억. 기억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된 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정말 선명해서 그날의 날씨와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의 얼굴과 복장까지도 기억이 나다가도 그 외의 다른 기억, 취업 활동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