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수님들을 참 좋아했다. 운동장에서 걸어가시는 모습으로 보나 강의하실 때 뿜어져 나오는 힘으로 보나 너무나도 멋있어서 외면하기 힘든 분들이었다. 프랑스어 공부를 어려워하는 친구들은 있어도 교수님들을 어려워하는 친구들은 없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교수님들과 대화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너 진짜 멋있다”였다. 누군가가 나를 굳게 믿어주는 느낌. 우리는 자연스레 은사님들을 롤모델이라고 부르고, 그들의 팬클럽이라도 된 양 좋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학기 번역 수업에서 C 교수님은 나와 다은에게 학술제에서 4학년 대표로 시 한 편을 낭독하라고 했다. 나는 이미 2학년 대표로 나간 적이 있었고, 3학년 대표로 나가지 못했던 것이 내심 아쉬웠던, 주목받기 좋아하는 학생이었기에 친한 친구와 졸업 전에 함..
(남다른 검소함을 지닌 독자님이라면 이번 글은 건너뛰셔도 좋습니다. 탈고하고 나니 정말 별것도 아닌 걸 길게도 써놨다 싶고 영 쑥스럽네요;;;) 2021년 대한민국의 본질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기조에서 돈은 참 많은 것의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다 많은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쪽에 속하기를 희망합니다. 부자인지 아닌지는 기본적으로 중산층에 속하는지의 여부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작년 초 의 보도에 의하면 정부가 OECD 기준으로 제안하는 한국 중산층 소득은 월 114만8500~344만5500원, 실제 국민들이 인식하는 중산층의 소득수준은 세후 기준으로 월 소득 500만원 이상 600만원 이하라고 합니다. 이 중 어떤 수치가 더 정확하다고 느껴지시나요? 솔직히 중산층이고 나..
2019년 12월, 나는 서울에 있는 집을 계약했다. 입주 일자는 2020년 1월 20일이었다. 나는 일자에 맞춰 짐을 꾸렸고, 수백 권의 책을 포장하여 이사할 집에 옮겨두었다. 원래 있던 가구는 다 버리고, 최대한 필요한 가구만 선택하여 신중하게 구매했다. 나름 로망이었던 원형 카펫을 주문했고, 친구들에게 자주 선물로 주던 CD플레이어도 사서 싸구려 원목 선반 위에 배치해두었다. * 사람들이 일과를 마치고 귀가할 때,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휴식과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집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집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위층 화장실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1m가량의 곰팡이가 넝쿨처럼 피어 내려온 벽지. 모래가 굴러다니는 지저분한 방바닥과 청소해도 끝이 없는 고양이 배설물과 지독..
두 달 전 동네의 한 작은책방에서 이 책을 업어왔다. 책방지기의 추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강렬한 표지에 이끌렸다. 아이의 모습은 온통 푸른빛과 잿빛으로 가득하다. 또 아이의 목구멍에는 생선 가시가 걸려 있다. 젓가락을 쥔 모양새는 또 어떻고. 그 젓가락은 반찬을 집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를 찌르기 위한 것만 같다. 무엇 때문일까. 아이는 왜 이다지도 깊은 잿빛의 모습으로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많은 게 설명된다. “너 같은 거 꼴도 보기 싫어!” 아이가 들은 말이다. 이 한 마디뿐이었다. 아이의 친구는 이 말만 뱉은 뒤 빠르게 멀어졌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이는 순식간에 누군가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아이는 그걸 견딜 수가 없다. 서둘러 나름..
Illustration ⓒ 은수 스스로의 눈을 가린 욕망 연말연시를 앞두고 박원순 전 시장(이하 박 시장) 성폭력 사건에 대한 새로운 뉴스들이 쏟아져 나왔다. 박 시장의 자살 당시 언론이 가장 주목했던 것 중 하나는 피해자의 고소 사실을 누가 박 시장에게 알렸는가 하는 문제였다. 피소인의 죽음으로 인해 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되는 것은 이미 예정된 바였고,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위치에 있는 서울시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진상조사다. 피해자는 과거에도 거듭 인사담당자 등을 통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서울시가 공표했던 성인권 기본 조례에 따라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피해자의 고충은 번번이 묵살해왔다. 피해자가 궁극적으로 택한 방법은 법률적 해결이 되었고, 그마저도 피소인의 자살로..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나는 정말 잘 살고 싶었단 말이야. 40km 풀코스 마라톤도 나가고, 이혼도 하고, 제주도에 가서 올레길도 걷고, 멋지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소리야, 왜 하필 나여야만 했지?” * 수자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샤브샤브가 먹고 싶다고 했고, 샤브샤브집이 위치한 상업지구 역 근처로 나를 불러냈다. 19년 8월 이후로 고기를 완전히 끊은 나로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저녁 식사였지만, 내가 거절하면 수자는 혼자 저녁을 먹게 되므로 내색하지 않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우리는 5시에 만났고, 2층인가 3층에 있는 샤브샤브 집 문 앞에 다다랐으나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30분 정도를 문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수자와 나는 대기석에 나란히 앉아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
가면 증후군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본인의 성취를 능력보다 운 때문이라 여기며 불안해하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심리증상입니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누군지 아는 엄청난 업적을 자랑하는 유명 인사들도 실은 자신이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다들 실망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유명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가면 증후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성취의 ㅅ도 없는 미천한 일반인은 대체 어찌 살라는 건지... 저만 해도 그래요. 누가 너그럽고 다정한 마음으로 칭찬이라도 건네면 마음속에서 ‘엇! 저 사람은 뭔가에 속고 있는 거야! 내 실력은 아직 저만큼의 말을 들을 정도가 아니니까 어서 부인해!’라는 마음의 소리에 좌뇌와 우뇌를 잠식당합..
by soon 어머님 전상서 유영순 1 어머니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우리는 64년 전 엄마와 딸로 처음 만났지요가난한 집의 삼남오녀 중 셋째 딸별로 환영받진 못했을 것 같아요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신 지 벌써 18년모든 짐을 내려놓고 편히 계시겠지요아버지도 만나셨을 테고 우리 형제들 지난날을 추억하며 아직은 형제애로 잘 지내고 있어요 아주 어릴 적 시골에서의 생활은 대나무 골목길에서 먼 산 중턱을 바라보며 일하러 부산 가신 어머니를 태운 버스를 기다렸던 기억밖에 잘 나지 않아요 부산으로 이사 와서는 온천장 파출소 사거리에서 진주 가신 어머니가 탄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지요 언제부터인지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경제적 어려움으로 고생이 많았지요부모님 솜털 타는 일 하실 때 집에서 잠시 쉬던 어머..
by cellophane PM 02:35 바람은 귓불을 날카롭게 스치지만 가장 볕이 따스한 시간이다. 회색 시멘트 바닥 위로 검은 운동화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산책하러 나온 지 3분 만에 돌아가고 싶어져 집으로 방향을 틀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회갈색 시든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뻗어서 멋들어진 나무를 제대로 구경도 못하고 지나치는데, 삼색 무늬 고양이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야옹.” 오늘 내가 처음 낸 목소리다. 빠르게 걷다가도 고양이 앞에서는 여지없이 멈춰 서게 된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궁금한 듯 눈이 동그래진 고양이가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도망간다. 불안 때문에 얼얼한 추위에도 식은땀이 났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외투만 벗고 이불안으로 몸을 쏙 집어넣는다. 오늘 에너지를..
2015년의 강남역 살인사건과 2016년의 문단내성폭력 말하기 운동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고 노골적이며 일상적인가 하는 비밀이 폭로된 사건이었다. 비밀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비밀이 아니라, 비밀이 되어야만 하는 당위로서의 비밀이었다. 폭력의 행위자들이 욕망하고 요구하는 비밀 말이다.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리부트는 그 비밀을 더 이상 비밀로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들의 총합에 다름 아니었다. 도처에서 증언들이 이어졌고, 증언들 뒤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연대체들이 생겨났다. 증언과 연대의 주체는 거개가 여자들이었다. 그 이후로 내 눈에 보이는 여성의 모습은 주로 ‘싸우는 여성’이었다. 방식과 영역은 달랐지만 모두가 그들 나름으로 싸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