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웹진쪽의 새로운 코너입니다. 나는 엄마를 낳기 싫다 허주영 집을 구했고, 수소문한 집을 나온다 집은 떠나고 돌아가고 또다시 떠다니는 곳 집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엄마와 나, 나와 엄마 나는 이분법을 좋아한다 또 다른 집에는 애인이 있고 다른 집에는 엄마와 길을 잃은 개가 산다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헷갈리는지 서로 기억하자고 대답하자고 안아준다 사랑은 흔들리기 위해 땅을 파고 작은 웅크림들과 접촉한다 이어지는 실타래들 나는 집을 나오고 조금 뒤에 이름의 획을 잃고 주머니가 달린 망토를 잃고 나쁜 습관을 잃는다 좋은 건가 몇 번의 이사와 멀지 않은 옆 동네 그것은 모두 좋은 일이었다 더 넓은 곳으로 옮아 나는 환..
계절과 사랑 해가 내리쬐는 잔디밭은 보랏빛 초롱꽃으로 가득차 있어. 지치고 그을린 날은 헐떡이고 풍차의 날개에 매달려 있지. 자연은 한 마리 벌처럼 꿀과 향기로 가득하고, 바람은 꽃들 사이에서 몸을 흔들고 반짝이는 온 여름은 선잠을 자네. 오, 아침의 맑은 명랑함이여. 자신만의 흐름으로 꾸밈없는 영혼이 춤추는 곳, 꼭 파초 잎이 드리우는 샘처럼! 빛을 발하는 거미들은 진홍빛 실을 따라서 미끄러지고, 젖은 그늘의 열기 속에서 심장은 태양빛을 타래에 감는다. 한낮의 취기, 염소 떼가 타고 오르는 적갈색 포도밭, 지평선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입술을 누르는 어지러움. 고개 숙인 호밀밭 한가운데에 서있는 오두막들, 넓고 낮은 문 앞에 어린 구즈베리 나무들이 있는 풍경... 공기가 잠잠해지고 잘 익은 수확물이 고개를..
“소리야, 이제 정말 그만두려고.” 수자는 산악 대장이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수자가 얼마 전 산악 카페 공지글에 대장을 그만두겠다고 썼기 때문이다. 수자의 암 투병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뜬금없는 하차 소식이었겠지만, 수자에게는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망설이던 일이었다. “그래, 나중에 다시 하면 되지.” 이 말을 하면서, 나는 조금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나중에’라는 말 때문인지, ‘다시’라는 말 때문인지를 한참 생각하다, 결국 말을 더 꺼내기를 그만두었다. “그렇지?” “…….” “그래.” * 두 딸을 낳고 평생 일만 하며 살아가던 수자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해야 기분이 좋아지는지, 어떻게 쉬어야 쉬는 것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
동거를 하고 있지만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없다. 그냥 이대로 살고 싶다. 며칠 전에는 아버지가 결혼 어쩌고 하는 상품에 가입해서 애인인 알파카와 결혼할 날을 대비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는데, 솔직히 말해서 결혼이라…. 지금으로서는 까마득하게 먼 이야기다. 물론 결혼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속한 사회는 이미 나와 애인을 사실혼 관계로 묶어버렸다(며칠 전의 일이다). 좀 어처구니없다. 내 허락도 없이, 자기들끼리 왜? 결혼을 안 하면 가족일 수 없는 걸까? 도대체 결혼과 가족은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으며, 왜 가족이 되는데 필수적인 절차로 자리 잡게 된 것일까. 현재 우리나라의 가구 비중은 2019년 인구주택총조사에 의하면 1인가구는 614만 8천 가구다. 전체적인 비중으로 봤을 때 “1인가구(30.2..
“나는 알아, 이 도시에서 작은 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책의 처음부터 이런 작은 목소리가 있다. 끄덕이는 목소리. 목소리 아래에는 겨울 도시의 풍경과 한 아이의 뒷모습이 행인1처럼 부려져 있다. 물론 아이의 몸은 그 밖의 행인1들에 비해 턱없이 작다. 작은 몸이 거기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 건 추위로 빨갛게 달아오른 아이의 볼 때문이었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아이가 단단히 짊어진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목소리는 아이의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목소리가 누구를 향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목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도시의 골목골목에 대하여 낱낱이 알려주고, 도시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을 속삭여주고, 도시 안의 숨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을 찾아 귀띔해준다. 목소리 안에는 다정이 가득하다. “숨..
* 은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웹진쪽의 새로운 코너입니다. 안미츠와 성실하고 배고픈 친구들 박규현 안미츠안미츠 씨가 사랑하는 건 아름다운 디저트 쇼케이스 볕이 잘 드는 테이블에 앉으려면일찍 가야 넉넉하고 안미츠 씨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아무 곳 아무 음식을 먹는 것이 제일 속상하다 차가 우려지는 동안 안미츠 씨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을 받아 적는 사이에 그들은 무언가를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미츠 씨처럼 모루 기나긴 몸이 되어서 긴 복도를 기어 다닌 적 있는데요 가끔씩 기다리라고 말했는데 기다리지 않은 친구들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흰 종이가 까맣게 될 때까지 반성문을 쓰라는 벌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 저녁 반찬은 뭘까 궁리했어요 이것이 최선이라면 ..
오늘 밤 네가 잠들 때 오늘 밤 네가 내게서 멀어져너만의 슬픈 밤으로 잠들 때,꿈속에서 내 팔을 베고 누운근심으로 무거워진 아름다운 목. 너를 방해하는 건 내게로 던져버려슬픈 생각들도 흐트러뜨려 그러면,난 그 어둠들을 그림자 속에 그러모을게.땅만 바라보며 이삭 줍는 사람처럼사랑에 취해,장미와 백합과 팬지의 수를 헤아리는 사람처럼... ─안나 드 노아이유『사랑의 시들』 (1924) 원문 제목 Quand ce soir tu t'endormiras Quand ce soir tu t'endormirasLoin de moi, pour ta triste nuit,En songe pose sur mon brasTon beau col alourdi d'ennui. Jette vers moi ce qui t'encomb..
illust by soon 나의 달을 찾습니다 오늘 이 새벽에도 없네아주 조그만 눈썹달과 초롱초롱한 별 둘2월 초 어느 날 우연히 보고 반해서 나의 달로 삼았네휴대폰 카메라에 담았건만 더 예쁜 모습 내일 새벽에 찍어야지 하고 지워버린 것이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날은 날마다 바뀌지달은 달마다 바뀌지 흐린 날 안개 낀 날 비오는 날 요즘은 미세먼지보고 또 봐도찾을 길 없고 아쉬움만 가득 찾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보이지 않을 때의 아쉬움 또 기다림 나의 달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어느 시상식 와아짝짝짝수고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누가 주는 상인지 모르지만 내가 상을 받고 있다주최 측도 모르고 상의 이름도 모르고 나는 어떤 좋은 일을 했을까 얼마나 잘했을까모든 걸 모른 채 나의 마음은 들떠 있네 누군가가 주는..
은수 님에게, 올해 첫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잤어요. 잠깐 깨서 배달 음식을 먹고 게임기를 켜서 게임 속 동물 친구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다시 잤죠. 그 전날, 전전날부터 계속 그랬던 거 같아요. 작년의 끝과 올해의 시작은 “잠만 잤다”가 되겠네요. 작년은 유행병이 돌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힘든 해였고 저는 또 별개로 엄마의 유방암 진단으로 건강에 대해 많이 공부한 해였어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 가장 많이 간 곳이 세브란스 병원과 서울역이었네요. 엄마의 보호자가 되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내가 누군가를 위해 고생한다는 사실, 아니 다들 고생한다고 생각해줄 거라는 사실에 조금 만족했던 것 같기도 해요. 제 마음을 돌아볼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 듭니다. 글의 시작부터 조금 우울한 분위기가 풍기지만, 이렇게 ..
일상이 부쩍 어려워진 건 당연했던 것들의 부재 때문이다. 마스크 없이는 외출할 수 없게 된 것부터 카페 테이블에 한가로이 앉아 있을 수 없는 것, 밤늦게까지 깔깔대며 술을 마실 수 없는 것. 방호복을 벗지 못하는 의료진과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볼멘소리도 안 될 말이지만, 염치없게도 나는 아무럴 것 없었던 일상을 되찾기만 바라고 있었다. 다섯 시면 해가 지고 세상은 오래 깜깜했다. 연말이면 만나던 사람들에게는 건강하자는 인사로 마음을 대신 전했다. 그즈음부터 KBS 명작 다큐 시리즈를 봤다.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이란 놀라운 것이라서, 어린 아이로 환생한 고승을 찾아다니는 스님의 이야기를 보고 나서부터 티베트와 관련된 영상들이 피드에 뜨기 시작했다. ▲ 차마고도를 지나는 마방의 행렬. 차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