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정수 검은 바닷속으로 몰래 사라진다면 어떨까 유례없이 꼼꼼한 계획을 세웠다. 나를 찾진 않겠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게. 나는 없지만 있는 듯하고 싶었다. 언제나 나는 죽음을 탐하고 죽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가만히 웃고 있으면 나는 사라졌다. 투명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담고 언제나 나쁜 것을 믿었고 내 진심은 거짓이 되었고 모든 감정을 당기고 밀어냈다. 내 믿음은 비었고 실망만 내 것이다. 함께 죽음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남겨진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나는 언제나 쓸쓸해 보였다. 나는 언제나 걸으면서 습관처럼 울었다. 거리에 하나들이 많을수록 크게 울었다. 늘 젖어 있는 텅 빈 손 그런데 내가 정말 하나였던 적이 있었어? 가만히 울음을 멈추고 다짐할 때마다..
마음작물 서정민주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돋아나는 철문 문짝 전문가가 방문해서 끼워주는 건 아니지만 마음 근육에 알아서 뿌리내리는 작물 소음에 강하지만 수다에는 약한 것이 심지이기에 수면 바지 입은 나와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근 나 둘은 실 전화기로 각자의 방 창문을 통해 대화한다. 💭 네가 하고 싶다고 해 🗣 나 떨리는데… 💭 마음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뭐 어쩌려고? 답답하다. 나 간다. 실 전화기를 단숨에 끊어버리고 은둔하는 마음 행동력이 필요할 때 다시 연락 오겠지마는 가오리 오리너구리 우리 강아지 비 어린이 비 부모집단에서도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금쪽같은 내 새끼 방공호 같은 문 뒤편에서 마음은 좋아하는 동물들과 뒹굴거리고 바질이랑 민트도 한 움큼씩 뜯어먹는데 외면의 이해심이 해처럼 드나들어서 따뜻..
새로운 사람 김지현 아침 해가 뜨면 쩡-하고 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많던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갈라지는 소리였다 무너져 내린 사람의 입가에는 주름이 팼다 갈라진 얼굴을 타고 자잘하게 밥 먹은 흔적이 깊었다 견고한 덩어리 같던 사람은 매일 조금씩 자잘하게 부서져갔다 빙하를 닮은 비누에게 거품을 얻어다가 사람은 얼굴을 씻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문지르고 닦느라 알뜰하고 단단하던 비누가 차가운 물속으로 녹아 내렸다 사람은 말없이 얼굴을 씻었다 새로운 사람은 너무 많으니까 너무 많다는 것은 죄스럽기까지 하지만 다시 절실하게 얼어붙은 바다만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 드느라 둔한 허리를 굽히고 폈다 아침이 되면 사람은 대답처럼 세수를 했다 * 이 시는 희음이 기획..
벌레와 예술 혜수 아주 무더운 여름날, 매미가 우렁차게 울던 밤에 우리는 플래시를 들고 다니며 곤충 채집을 했다. 막 탈피한 매미 유충은 기이할 정도로 투명한 연둣빛을 띄면서 갓 태어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그 얇은 속살이 타버리지 않을까 먼지 많은 이곳에서 점점 질식하지 않을까 아니, 매미의 천적은 무엇이지 이런 걱정을 하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밤잠을 괴롭히는 매미 소음, 죽겠다, 괴롭다, 알고 보니 사람 탓 빛이 없는 밤이 돼야 울음을 그치는 매미가 가로등 때문에 낮인 줄 알고 계속 운다는 것이다. 플래시를 켜고 걷다 보니 나방들이 날아들었다. 나비보다 나방이 좋다는 나를 보며 칙칙한 걸 좋아한다고 핀잔을 주는 너는 사마귀를 가장 좋아하는데 예전에 길을 건너다 차에 깔려 죽은 사..
쓰고 있는 말 홍지연 10년 전 일기에서 쪽지를 발견했다 빛바랜 종이 한 장에 꾸역꾸역 쓴 쏟아질 것 같은 글씨 그날부터 계속하고 있는 너의 말 의연에게 내가 너에게 보내는 말과 네가 받아서 읽는 말의 시간차에 대해 생각해 모든 게 깨어나는 새벽에 근심과 걱정을 담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이 말이 너에게 닿을 때는 모든 일들이 일어난 다음일까? 쉬지 않고 죽어가는 나무들에 대해 생각해 너무 더운 아니 너무 추운 날씨에 대해서도 집을 잃은 철새들에 대해서도 차라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어항 속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물이 새어나가는 어항 속이라고 그럼 온몸을 끼워 맞춰서라도 틀어막을 텐데 네가 이 글을 읽을 때, 이미 벌어진 막지 못한 일들에 대해 생각해 아니 막지 않은 거겠지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
소라 이불 김선주 이불이 파도처럼 소라를 덮쳤다 엎드린 소라 소라가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동안 하루가 다 갔다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소라의 하얀 발가락 망가뜨리고 싶었다 대신 아이의 발가락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소라의 이름은 엄마가 지어주었다 이름을 짓는 것, 엄마의 권한, 엄마들은 턱을 더 높이 들고 아이들의 원망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고개를 숙이면 아이들은 쉽게 죽었다 소라는 이미 이름 붙여진 날들을 너무 많이 통과해 온 기분이었다 그 이름을 찢고 자르고 박음질하여 전혀 다른 이름으로 탄생시켰다 이불이 이불을 낳고 소라와 닮은 소라를 기르고 이불과 소라를 덮고 자는 작은 이마, 아직 채 구겨지지 않은 점토 흔한 상처 하나 나지 않고 커지는 풍선처럼 아이는 조금씩 자랐고 다시 줄어들었다 소라는 또다시..
나는 붉은 꽃을 주면 좋겠어.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설핏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봤을 때 보인 건 차곡차곡 쌓인 새하얀 국화였다. 붉은색이라곤 없는 이곳에서 엄마는 뭐가 그리 좋은지 환히 웃고 있었다. 엄마는 꽃을 좋아했다. 들여다 놓으면 죄다 시들게 만들어 문제였지, 이건 꽃이 예쁘고, 저건 잎이 독특하다며 틈이 나면 하나씩 가져왔다. 햇볕 좋고 경치 좋은 자리는 사막의 식물들이 차지했다. 선인장과 같은 식물은 강렬한 태양 빛을 받아야 한다며 한겨울에도 볕 좋은 베란다에 내다 둔 탓에 선인장은 얼어붙었다 녹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그런 식이었다. 나도 식물이었다. 내가 가져본 식물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게 너야, 하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저 아끼는 자리를, 아..
십대의 후반이었을까, 소크라테스의 직계 후손인 것마냥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정언명령으로 삼아 살던 시기가 있었다. 존재의 의미를 찾는 데 골몰하며 유난히 자신을 기록하는 데 여념이 없던 어느 날이었다. 블로그에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올리고 무어라고 기록을 했다. 댓글이 달렸다. 나도 그 노래 좋아한다고. 그 댓글에 이야기를 더 이어 붙였다. 취향이 비슷한가 보다, 혹시 그 가수의 다른 노래도 좋아하느냐고. 이어진 댓글에 아는 노래 제목이 쓰여 있었다. '이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노랜데?' 나는 외적으로는 다수의 취향이길 원하고, 내적으로는 나만 알고 있는 것들이 가득하길 바라는 모순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공유할 수 있는 소수의 단짝을 늘 갈망했다. 황급히 댓글을 더 달았다. 단어와..
목이 부러진 새였다. 목을 아래로 꺾고 노란 다리를 하늘로 치켜든 독특한 자세로 흙먼지가 가득한 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올리브색이 감도는 갈색 깃털이 아직 보드라워 보였다. 손을 가져다 만지면 금세 일어나 담장 너머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가만히 새를 바라봤다. 감긴 것인지, 이미 부패해버린 것인지 모를 눈, 꽉 다문 부리, 회색 머리와 솜털 같은 흰 배, 엊그제 먹었던 야식과 닮은 샛노란 발까지.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글을 떠올렸다. 유리창 충돌 사고와 관련된 글이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가만히 새를 바라봤다. 그 글의 주인은 따뜻한 어딘가로 새를 옮겨주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릴 적 시체를 만지는 느낌이라며 눈을 감고 친구의 두 손가락을 만졌던 기억이 되살아..
다른 회사에서도 이 시스템을 따라 하고자 수천 번을 노력했으나, 아무도 이 회사같이 사실적인 가상 연애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다. 이 회사의 독주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향후 몇 년간은 제일 비전이 있는 회사였다. 나는 방송국을 관두기로 했고, 그 사실을 남자친구인 D에게 말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물건을 집어던지며 다짜고짜 ‘너도 그 워마드(메갈에서 업그레이드가 되었다.)년 따라 가냐, 가짜가 그렇게 좋으냐.’ 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컴퓨터와 섹스를 해보라는 말까지 했다. 이 발화에선 정정할 게 몇 가지 있었다. 일단, 나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이지 서비스를 이용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재하는 컴퓨터가 아니라 관자놀이에 칩을 붙일 때만 AI와 연애하는 시스템이며, 섹..
D의 얼굴에 거즈, 붕대 따위가 빈틈없이 올려져 있다. 다시 그가 눈을 뜰 수 있을까. 눈을 떴을 때 사람의 얼굴 같은 얼굴을 가질 수는 있을까. 헤어진 후 매일매일 그가 자빠져서 잘난 코를 깨먹기를 바랐지만 이렇게 큰 사고를 겪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이 사건의 전조를 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202X년다운 일이다. AI가 저지른 범죄의 산물을 내 눈앞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이 일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인간인 내가 물어야 하는 책임일까? “걱정하지 마.” 뻔뻔한 범죄자, 아니 범죄 AI는 이런 내 걱정을 듣고도 D의 목소리로 다정스러운 위로를 건넨다. “네가 저지른 짓이야?” “혜민. 인간은 절대 나를 잡을 수 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때, 간호..
* 은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웹진쪽의 새로운 코너입니다. 나는 왜 비건이 되었나 한지윤 내가 비건이 된 결정적인 계기는 좋아하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자신을 비건이라 소개했다. 그 뒤로 나도 페스코로 채식을 시작하게 되었고 페스코 단계에 해당하는 생선, 우유, 계란 중에서도 생선만 먹었다. 그러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선은 생명이 아닌가? 그러자 이내 ‘생선은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부끄러워졌다. 페스코로 시작한 건 채식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동물권을 생각하는 채식이라면 당연히 비건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한 달 후에는 비건이 되었다. 비건이 되고 나서 나는 행복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얘깃거리도 생기고..
* 은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웹진쪽의 새로운 코너입니다. 담요을 잃어버려서 다행입니다 zxcv 담요를 잃어버려서 다행입니다 저를 잘 길러 돌려주세요, 홍학이 말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 택견을 알려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홀새김첫단을 시작합니다 회목치기 밭장치기 학치지르기 안짱걸이 깍음다리 세계사의 한 축으로 우리는 리듬과 스텝이 되어 각자 참전했습니다 휴전을 잊었습니다 사랑하지만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잠깐 떠올렸습니다 낮에 웃는 학생들이 낯설었습니다 허수아비를 하나둘 안아줍니다 무림의 고수가 여기 동료를 찾아왔다는 듯이 흰 천에 코를 풀고 싶었습니다 흰 천에 입을 닦고 싶었습니다 흰 천에 고개를 파묻고 일어나지 않고 싶었습니다 어우르지 않는 밤의 캠프파이어는 ..
* 은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웹진쪽의 새로운 코너입니다. 나는 엄마를 낳기 싫다 허주영 집을 구했고, 수소문한 집을 나온다 집은 떠나고 돌아가고 또다시 떠다니는 곳 집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엄마와 나, 나와 엄마 나는 이분법을 좋아한다 또 다른 집에는 애인이 있고 다른 집에는 엄마와 길을 잃은 개가 산다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헷갈리는지 서로 기억하자고 대답하자고 안아준다 사랑은 흔들리기 위해 땅을 파고 작은 웅크림들과 접촉한다 이어지는 실타래들 나는 집을 나오고 조금 뒤에 이름의 획을 잃고 주머니가 달린 망토를 잃고 나쁜 습관을 잃는다 좋은 건가 몇 번의 이사와 멀지 않은 옆 동네 그것은 모두 좋은 일이었다 더 넓은 곳으로 옮아 나는 환..
* 은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웹진쪽의 새로운 코너입니다. 안미츠와 성실하고 배고픈 친구들 박규현 안미츠안미츠 씨가 사랑하는 건 아름다운 디저트 쇼케이스 볕이 잘 드는 테이블에 앉으려면일찍 가야 넉넉하고 안미츠 씨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아무 곳 아무 음식을 먹는 것이 제일 속상하다 차가 우려지는 동안 안미츠 씨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을 받아 적는 사이에 그들은 무언가를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미츠 씨처럼 모루 기나긴 몸이 되어서 긴 복도를 기어 다닌 적 있는데요 가끔씩 기다리라고 말했는데 기다리지 않은 친구들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흰 종이가 까맣게 될 때까지 반성문을 쓰라는 벌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 저녁 반찬은 뭘까 궁리했어요 이것이 최선이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