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말. 어쩌면 평생 가장 많이 내뱉는 말. 해를 거듭할수록 무겁게 느껴지는 말.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말. 존경하는 만큼 미안하고 고맙고 또 미안해지는 말. … 사랑하지만 좋아함에는 자신 없는 말. 내게 엄마(그리고 아빠도)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같‘았’다. 그렇게 느‘꼈던’데는 여러 서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22살의 일이다. “엄마야. 아빠가 일하다 갈비뼈 세 개가 부러졌어. 그래서 지금 입원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말해봐.” “공사 현장 나갔는데 기계가 아빠를 못 보고 쳤나 봐.” “하… 산재는?” “산재는 안 해주는데 현찰로 사백만 원 준데.” “엄마, 그게 말이 돼?! 사람이 갈비뼈가 세 개나 부러졌는데 사백만..
쥐의 노래 당신이 내가 노래하는 걸 들을 때 당신은 겨냥하지만, 늘 못 맞추는 내 머리를 향한 당신의 소총과 손전등을 내리지 그리고 당신이 독약을 내놓을 때 다른 이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나는 거기에 오줌을 싸놔 당신은 생각하지: 너무 영리한 걸, 그녀는 위험해, 나는 도살당하기 위해 여기 있는 건 아닌데 너는 내 모피, 어여쁜 이빨, 여섯 개의 젖꼭지와 뱀 꼬리 에도 불구하고 내가 못 생겼다고 생각하지 내가 원하는 건 사랑이야, 이 멍청한 너 휴머니스트. 눈이 달렸으면 봐봐. 맞아, 난 기생충이야. 난 네가 남긴 것들, 연골과 부패한 지방에 의지해서 살고, 나는 물어보지 않고 가져가지 또 당신의 정장과 속옷에서 빠져나와 찬장에 둥지를 틀지. 당신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할 거야, 당신이 내 투명한 증오를..
마을 어르신이 돌아가셔서 엄마를 대신해 장례식에 다녀왔다. 집에서 시내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한 번 더 갈아타야 장례식장이 있다. 도착해서 조문하고 조문객들과 인사하다 보면 두어 시간은 금세 지난다. 그리고 또다시 두 번의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반나절은 거뜬히 지날 것이다. 엄마가 이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취침 시간을 잃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비교적 시간이 많고 운전도 할 수 있는 내가 엄마를 대신해서 장례식장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 장례식장은 작년 여름에 할머니를, 그리고 지난봄에 아빠를 떠나보냈던 장소다. 서울이든 수원이든 외지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외길인데, 장례식장은 그 길목에 위치해있다. 장례식장이 위치한 언덕을 지날 때마다 작년 여름 할머니 장례를 마치고 추적추적 내리던..
막 성에 눈을 뜬 사람 마냥 지나가는 바지춤만 봐도 침을 꼴깍 삼킬 만큼 성적 에너지가 활활 타오르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그 화력을 키운 마른(Thin) 장작 같은 한 사내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길쭉하고 말라서 흡사 마른 장작 같았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나는 속으로 그의 물건을 추앙해 마지않았다. 그것은 단연코 그의 신체 중 가장 덜 마른 장작스러운 것이었다. 그 역시 경험적으로 자신의 물건이 값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앞으로 결코 다른 사람과의 잠자리를 만족하기 어려울 거라며 저주에 가까운 허풍을 떨었다. 나는 피식 웃어주었다. 그도 별 수 없는 ‘한국 남자’였다. 마른 장작의 ㅈ부심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는 게 뒤이어 만난 한 사람을 통해 드러났다. 그이의 그것은 일명 피넛 (땅콩)이라고,..
12층으로 신축된 멀티쇼핑몰에는 화려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쇼핑몰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여러 종류의 인공로봇들도 적지 않았다. 집사봇이라 불리는 인공로봇들은 아이를 달래기도 하고 노인들의 휠체어를 밀기도 했다. 얼핏 보면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 고급 사양의 휴머노이드부터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구 모델의 로봇까지 다양했다. 조이와 나는 신발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수를 찾아갔다. 수는 멀리서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수는 일하고 있는 다른 안드로이드 로봇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일과 상관없는 이런 일을 왜 해야 하는 걸까? 언젠가 조이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정말 중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결국 수도 돈 때..
부재중인 방과의 경합으로서의 독백- 고해종 극·연출 에 부치는 너무 이르거나 늦은 엽서 이 연극은 하나의 좁은 방을 무대로 삼고, 그 무대 위에서 말을 이어나가는 한 여자를 유일한 등장인물로 삼는다. 여자에 대하여 우리가 단번에 알 수 있는 사실은, 여자가 취업 준비생이며 원룸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점이다. 여자는 일상을 이어나가는 일조차 육중한 짐처럼 느끼고 있다. 먹고 자고, 살고 움직이는 일조차 버겁게 느끼는 존재. 너무 가벼워서 자신을 둘러싼 다른 모든 것들을 너무 무겁게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 하지만 여자에 관한 이 특별한 수사는 이제 더 이상 특수한 것이 아니다. 이 시대의 청년, 특히 여성 청년에게 시간의 무게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청년은 청년 담론의 ..
- 음. 벽화라고요. 잠깐 들어와 봐요. 원이는 다짜고짜 동사무소 직원입네 하고는 벨을 눌렀다. 그러자 현관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벽은 온통 진한 색 나무 판넬로 감싸져 있었다. 어린 시절, 동네 부잣집 친구네 집이 이런 느낌이었지... 뜨거운 낮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내부는 어둡고 서늘했다. 입구에 늘어선 하얀 리본 달린 슬리퍼에 조심스레 발을 넣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거실 곳곳에는 상장과 감사패, 온갖 종류의 기념사진들이 가득했다. - 음. 내가 말이죠. 벽화에 대해 할 말이 아주 많아요. 사실 우리 사돈처녀가 추계예술대학교에서 강의해요. 알죠? 추계예술학교! 나도 어려서 음악을 시킬까 미술을 시킬까 할 정도로 집안 자체가 예술에 조예가 깊어요. 그런데 벽화라는 게 이렇게 말하면 좀..
맨스플레인 구멍이 되려고 태어나신다소리 나는 구멍이 되려고조였다 풀었다 소리 나는 구멍이부드럽고 미끄럽게 조였다 풀었다 제대로 죽여주겠다는 막대기를 오르내리며바늘머리를 빼닮은 신념들이 ‘제대로’라는 오버사이즈를 걸치고허락 없이 자꾸만 흘러 들어와서 구멍이 되려고 태어나신 구멍은간지러워 죽는다 구멍이 되려고 태어나신 구멍은 도리가 없다생으로부터 돌아서신다 죽음으로 생을 벅벅 긁으며죽음이 낫구나,죽음은 이렇게 시원하구나! 시인 '희음'은 말합니다. 이따금 시인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나의 시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어요.나의 목소리를 의심했지만, 이제 나는 내가 아닌 세계를 의심하기로. 처음부터 다시 씁니다. 가깝고 먼 곳에서 경련하는 귀를 봅니다.
어릴 적만 해도 동네마다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모두 다 문을 닫고 한곳만 남았다. 그마저 남은 한 곳도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집의 경우에도 10분 거리에 있는 시내의 큰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인터넷 거래를 애용하지 그 구멍가게에서는 과자 한 봉지도 구매하지 않게 된다. 이는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자가용이나 마을버스 등의 교통은 편리해지고 자연스레 구멍가게의 소비자가 감소하게 되었다. 소비자가 떠나니 구멍가게의 진열대도 해를 거듭할수록 초라해져 마침내 담배가 주력상품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어디 구멍가게뿐이겠는가. 우리 동네는 예로부터 ‘탯마당’ 혹은 ‘떼지거리’라 불렸다. 전자는 타작을 많이 하는 동..
돼지의 노래 당신이 나를 이렇게 바꿔 놓았어요. 천천히 벌어지는 순무처럼 게으른 눈과 사람 비슷한 엉덩이를 가진 회색 분홍빛 채소로, 당신 차례가 돌아왔을 때 당신이 먹을 수 있도록 당신이 채워 놓은 가죽, 냄새나는 살 주머니, 우적우적 먹고 부풀어 오르는 피의 커다란 덩이줄기. 그렇다면 좋아요. 그러는 동안 나에겐 절반만 갇혀 있는 하늘이 있고, 나의 풀들[대마초들]이 있는 구석들이 있고 뿌리와 코에 관한 노래를 부르느라 나는 바쁘죠. 똥에 대한 나의 노래. 부인, 이 노래가 당신을 모욕합니다, 당신이 단순한 욕심을 성욕이라고 착각하면서 강압적으로 성적이라고 느끼는 이 꿀꿀거리는 소리 말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 당신이 나에게 쓰레기를 먹이면, 나는 쓰레기의 노래를 부를 거예요. 이 노래는 [당신에 대..
마을 자투리땅의 풀을 보면 그 마을 사람들의 연배를 가늠할 수 있다.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마당에 정원도 제법 가꾸고, 누구나 논둑이나 밭둑에도 콩을 심었으며, 길가에 많은 꽃도 심어져 있었고, 마을 귀퉁이마다 은행나무나 앵두나무, 살구나무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류나무부터 해서 이름 모를 꽃들로 정원을 가득 채우셨던 이웃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십여 년 전에 떠나셨고, 늘 기운차 보였던 옆집 할머니도 허물어지는 정원의 울타리에 그저 작대기를 세워둘 뿐 재정비하기 어려우실 정도로 늙으셨다. 함께 뛰놀던 또래들도 다들 이 마을을 떠났다. 우리 집만 해도 세 딸 모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이 마을을 나서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고 이곳에 삶의 터전을 이룩한 분들만 남아 가까스로 마을을 유지하고 있다..
너는 내 운명 너는 말했어 나만이 너를 채울 수 있다고 나는 부드러운 살점을 내줬지 너는 말했어 나만이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나는 선홍빛 심장을 내줬어 내 눈에 빠지고 싶다고 말해서 두 눈알을 파내 네 손에 쥐어줬어 내 귀에 속삭이는 캔디 같은 사랑해 마음에 밀랍을 부었어 너를 위해서만 내 모든 것을 쓰게 한 너는 내 운명 헤어지자 한 마디에 하얗게 얼어버린 연탄덩이 내 머리통에 갈긴 너 사랑하지 않아 한 마디에 국가대표급 이단옆차기로 나를 날려버린 너 시선을 돌릴 때마다 내 머리카락 뜯고 잘라버린 너 다른 운명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찢기고 멍들었던 내 몸의 주인인 너는 내 운명, 너는 내 운명? 한 세기를 지나니 산더미처럼 쌓인 엿 같은 운명들 엿가락처럼 늘여 엿가위로 뚝뚝 끊어 먹고 핥아 먹고 다 ..
벌써 입동이다.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할 준비와 끝자락인 가을을 보내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가을걷이를 마치면 좀 한가할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일단은 김장 준비를 위해 여름 내 공들여 말린 고추를 가루로 빻았다. 고추를 이백 주 심었는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 따서 옮기고, 통째로 며칠 말리고, 닦아 가위로 자르고, 햇볕에 말리되 타지 않도록 지나친 직사광선은 피해줘야 하고, 밤낮으로 비와 이슬을 살피며 거둬들이고 또다시 널기를 고추가 바싹 마를 때까지 반복하여야 한다. 가뭄으로 고추 농사가 어려웠기에 올해는 평년보다 고추 값이 좋았다. 본격적인 수확에 들어가기 전에는 호기롭게 내년에는 오백 주 심자고 엄마에게 제안했는데, 고추 손질을 한차례 마친 뒤에는 삼백 주 이상은 꿈도 꾸지 말자고..
패터슨 씨, 차라투스트라 씨라도 만났나요? 그의 말! 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랑하노라.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지니고 있는 자를.” (1부 ‘머리말’ 中)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1부 ‘머리말’ 中) “춤 한 번 추지 않은 날은 아예 잃어버린 날로 치자! 그리고 큰 웃음 하나 함께하지 않는 진리는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자!” (3부 ‘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에 대하여’ 中) 발화욕이 왕성한 차라투스트라는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주옥같은 명언들을 쏟아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덮는 순간, 정작 차라투스트라가 뭐랬다는 건지…. 그래도 그 많은 말 중..
살기 나는 내가 여자인 줄 몰랐다착하게 자라야 한다고 해서착한 척하는 아이에서 더 못 자랐을 뿐 여자가 나대면 안 돼적당히 해여잔 남자를 잘 만나야지너는 비정상이야 아무 것에도 화낼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산 적이 없어서 몰랐지몇 인간만이 아니라세상이 온통원래 그렇다고? 다 그렇게 산다고? 일반화 하지 마불편해서 어떻게 살아예민해서 일상생활 가능해? 뭐가 이렇지?온통 잿더미 속의 나재를 먹고도살아남으려면 싸워야겠다 나까지 그렇게 살라고?치렁치렁 인형 옷을 찢어버릴래긴 머리털을 다 뽑아버릴래매끈한 다리를 꺾어버릴래 나는 살기가 필요해나는 내 살기를 원해 시인 '채은'은 외자 이름 아닙니다. 내 언어를 갖고 싶어 시를 썼습니다. 인생 목표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 현재는 천방지축 삽니다. 인류애를..
올빼미의 노래 나는 살해된 여자의 심장이다 집으로 가는 중에 길을 잘못 든 여자 공터에서 교살되고 매장되지도 못한 여자 나무 아래에서 겨냥된 총에 맞은 여자 날선 칼에 의해 난자당한 여자 수많은 우리가 있다 나는 깃털을 길렀고 그녀를 찢고 나왔다 나는 깃털 덮인 심장처럼 생겼다 나의 입은 끌이다, 나의 손 손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들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며 숲속에 앉아 있다 단조로운 이야기: 죽음으로 향하는 많은 길이 있지만 죽음의 노래는 하나만 있지 안개의 색: 그것은 왜왜(Why Why)라고 말한다 나는 복수를 원하지 않고, 나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오직 누군가에게 묻기를 원한다 어떻게 내가 실종됐는지, 어떻게 내가 실종됐는지 나는 살인자의 잃어버린 심장이다 아직 죽이지 않은 살인자 자신이 죽이..
종교의 영향이 큰데 ‘사랑’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 지난 번 글에서 엄마처럼 나도 나의 애정이 향하는 곳을 찾아야겠다고 했는데 슬프게도 어쩌면 그동안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나 자신을 사랑하기’, 요즘 이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누군가 ‘종교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멋진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인생의 한 치 앞도 알기 어려운 인간이 신을 알아가고 이해한다는 것은 꽤나 경솔하니, 종교를 통해 그저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이해해 간다면 그것으로 종교의 역할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참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가 맘에 든다.(집 앞의 단풍) 편안함, 만족함, 뿌듯함, 기쁨, 희열, 성취..
김해 공항에 오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서울-부산 장거리로 사 개월 정도를 만났는데 그런 연애는 또 없을 예정이다. 그날은 내가 부산으로 데이트를 하러 간 날이었다. 기차역으로 마중 나온 그는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며 김해 공항 근처로 날 데려갔다. 억새가 듬성듬성한 허허벌판이었는데 착륙하는 여객기가 머리 위로 지나다녔다. 어둑어둑한 들판 위로 비행기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 저기 비행기가 온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속으로 '그래 비행기가 오네' 했지만 들뜬 시늉을 했다. 예상한 대로 비행기는 불나방처럼 날아들어 활주로를 향해 부지불식간 지나갔다. 굉음과 함께 몸체가 손에 닿을 듯 하강하는 모습을 그토록 가까이 볼 기회는 다시없으리라. 놀랍게도 감흥이 일지 않았지만 그저 그런..
여성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다시, 실비아 플라스예요. 번역 시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작품들은 시적 구성과 비유, 사유의 흐름이 워낙 단단해서 여러 번 들여다봐도 매료되지 않을 수 없죠. 여성 억압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후기 시의 경우가 특히 그렇고요. 이번에 소개할 시는 라는 짧은 작품이에요. 은유 나는 아홉 음절로 된 수수께끼입니다.코끼리, 육중한 집,두 넝쿨손 위에 한가로이 매달린 멜론.오 붉은 과일, 코끼리 상아, 질 좋은 목재!발효되느라 크게 부풀어 오른 이 빵 덩어리.이 두둑한 지갑에 담긴 새로 주조된 돈.나는 수단이고, 무대며, 새끼를 밴 암소입니다.내릴 수 없는 기차에 올라탄 채,나는 풋사과 한 자루를 다 먹어치웠습니다.(1959년 3월 20일) - 출처: 『실비아 플라스..
3초의 선율에 핀 모과 향기 그 아이는 엄마의 먼 친척 조카였다. 어느 날 그 친척 식구들이 자가용을 타고 우리 집에 왔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 자동차를 자가용이라고 불렀고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부자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서울 변두리 동네 골목길에 세워진 자가용을 동네 아이들이 둘러쌌다.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며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함께 땅바닥에서 소꿉놀이나 사방치기를 하던 아이들의 꾀죄죄한 얼굴들이 부끄러웠고 부자 친척을 둔 내가 동네 아이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아 화가 났다. 그 아이는 나를 가끔 힐끗거리며 동생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자가용이 있는 골목을 등지고 집으로 서둘러 들어가 버렸다. 그 아이는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