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다짐 “엄마, 나는 앞으로 명절에 외가에 가지 않을 거야.” 우리는 친가의 식구들이 없다. 조부모께서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셨는데, 곧 우리 아빠와 고모다. 할아버지는 30년 전에, 할머니는 재작년 여름에, 아빠는 작년 봄에 떠나셨고, 고모는 평생 아들만 챙기던 식구들에게 상처를 받아 연을 끊은 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반면에 외가는 딸 다섯, 아들 하나다. 외가 역시 그 잘난 아들 하나 얻자고 육 남매를 낳으셨다. 이모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결혼으로 출가를 이루고, 팔순이 된 외할머니는 어느덧 중년이 된 막내아들을 여전히 각별하게 생각하신다. 명절이 되면 육 남매와 다섯 이모부, 그리고 12명의 사촌이 모이는데 그야말로 명절 분위기가 난다. 명절 때마다 서울 외가에 가면 무언가 늘 불편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비혼주의자다. 비혼의 삶을 적극적으로 택했다기보다는 결혼할 이유를 찾지 못해 비혼주의자다. 그런데 그 비혼주의, 더 못할 수도 있겠다. 결혼할 이유가 생겼으므로. 나는 집을 좀 사야겠다. 이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동쪽으로 난 큰 창으로 사시사철 나무를 볼 수 있는 집이다. 창으로 나무를 볼 수 있는 집, 내 오랜 드림하우스다. 집 앞에 작은 대나무 숲이 있고, 그 앞으로 무려 '불국사'라는 이름의 절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눈 오는 날 자그마한 대웅전 기와에 쌓인 눈은 세상 모든 운치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 집은 3층밖에 되지 않는 지은 지 40년 된 연립주택이지만, 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도심을 굽어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뜨끈한 차 한 잔을 후루룩 마시며 그 풍경을 내려다보는 ..
사라진 조이에게는 이틀 째 아무 소식이 없었다. 경찰은 집과 연구소 주변의 CCTV와 스마트 장치로 위치를 추적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남은 단서는 밤늦게 연구소에서 그가 파일로 남긴 고고학 보고서가 유일했다. CCTV와 위치 추적 장치 안의 기록은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 이렇게 행적이 깨끗하게 소멸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관할 경찰서 컴퓨터에는 범죄사고의 예방 차원에서 개인의 행적기록들이 자동으로 하드에 기록되니까요. 하지만 조이 씨에 대한 기록은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실종되기 전까지의 모든 기록들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경찰관들은 컴퓨터시스템에서 개인 정보가 유출되거나 삭제되었다는 경고알림을 확인하고 바로 이곳으로 출동했다. 수가 경찰에 전화를 거는 순간 ..
노인회장의 인사가 마무리 되자 선매동 벽화마을만들기 팀원들이 신나게 박수를 쳤다. 한낮을 향해가자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연신 땀을 닦으랴 양산을 들랴 박수를 치랴 쉴 틈이 없었다, - 박수 칠 때마다 양산이 한들한들하는 것이 아주 나비 떼가 따로 없구나! 장관일세! 그 말을 들은 박여사가 곧바로 “예술적 감각이 끝내주시네” 하며 추켜올려준 덕에 사방에서 살뜰한 대화들이 오고갔다. 박여사도 덩달아 신이 났다. 조만간 춤판이 벌어져도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다. - 안녕하십니까. 선매동 벽화마을 지원사업 진행을 맡고 있는 문화예술기획자 심종상입니다. 여러분. 마을 벽화 하면 무엇이 먼저 생각나십니까? 과거 열악한 환경을 예술로 가리려는 환경미화적 목적에서 진행되었다면, 현재는 지역민의 생활 속..
『제3천년 심장』에서 발췌 어떤 것도 열어 보이지 않으리란 생각, 굴욕과 폭행이 발생할 만한 어떤 구역도 갖지 않으리라는.혈류도 마찬가지 어떤 인프라도 없어 해와 달의 전차들 슬쩍 닿기만 해도 제멋대로 굴러 가지 몸의 안쪽에서 환히 빛나는 굴욕감을 실어 나르며 아브라카다브라 울부짖는 몸 구석구석 주문을 외우지.난 비싼 약물을 쓴다네. 분노의 땀과 정제, 달콤한 알약, 연고. 향유를 바르렴. 한 주전자의 코마에 세 봉지를 우려내렴.바위로 나는 동굴의 입을 막네. 아무도 나가지 못해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해서 아무것도 부활할 수 없으리니 그 이름, 등 뒤에 꽂힌 칼이 다시는 결코 내 편집증-시체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니. 아직 쓰이지 않은 채로 나는 남아 있겠네.(이필 譯) 이 시는 독립된 한 편의 제목이..
카페 남자와 헤어지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쳤던 비가 다시 내렸다. 대기는 축축하고 서늘했다. 어쩐지 시간을 곱절 이상으로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동안의 시간이 한나절 속에 차곡차곡 접혀 들어가 있는 듯 느껴졌다. 길을 걸으면서도 접힌 자국들에 새겨진 상념과 기억들에 발이 붙들리곤 했다. 걸음은 느려졌고 날은 빨리 어두워졌다. 나는 반복되는 일정한 패턴과 생활, 규칙을 익히게 되면서 서서히 진화해왔다. 조이의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의 습득이 주된 학습 동기였다. 하지만 남자를 만나고 난 후 나는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남자를 통해 내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자는 나를 통해 그의 애인이었던 데이빗을 떠올렸으며 그와 내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비교했을 것이었..
생각의 전환 지난 10월부터 1월까지, 총 14주 동안 매주 쓰던 글을 격주로 연재하게 되었다. 겨울이 되어 농한기에 접어들며 농사일이 한산해진 때문이기도 하고, 새해가 되며 새롭게 시작된 두 가지의 일에 적응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재 날짜가 길어진 만큼 긴 호흡을 가지고 글을 쓰리라 다짐하며, ‘리얼 포레스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리얼 포레스트’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따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 준비를 하던 주인공 김태리는 “배가 고파서” 시골에 내려간다. 각자의 사정으로 그러나 모두 도시 생활에 지쳐 시골로 내려온 고향 친구들과 일상을 함께하며, 조금씩 자신만의 방식과 속도로 삶을 이해해가는 과정이 그려진 영화다. 그럼 나는? 나는..
나의 1월경기도 양주, 2012 사진가_ 황석선 stonesok1@naver.com
아내의 재난 매뉴얼 버려진 도시가 불타오를 때남자들과 아이들이 도망가고 난 뒤가만히 서서, 먹잇감처럼 조용히 천천히 돌아보라. 저주의 땅을 바라보라. 버려진 도시가 불타오를 때무너진 현관을, 부서지지 않은 빵을 남아서 애도하라. 겁내지 말라. 그들을 따르지 말라.의로운 듯 달아나는 발걸음을 견뎌라. 대신가만히 서서, 먹잇감처럼 조용히 천천히 생각을 거두어 탈출을 내려놓아라.철문의 걸쇠는 풀려 있고 책임은 벗어버렸다.버려진 도시가 불타오를 때 당신 안의 부름을 받아들여라. 남아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라. 죽은 듯 꼼짝 않고먹잇감처럼 조용히, 천천히 뒤를 돌아 본질적인 무엇으로 변하여라. 쓰러진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라. 먼저 달아나지 말라.버려진 도시가 불타오를 때 가만히, 조용히 서서 기도하라. 돌아오라. ..
델리에 와보니 어딜 가도 개들이 참 많다. 강아지는 보이지 않고 주로 중 대형견들이다. 낮이고 밤이고 거리에 널브러 자는 개들이 정말 많다.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해치기는커녕 긴장한 이방인에게 ‘느긋하라’ 말해주는 유일한 존재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개들은 죄가 없다. 죄가 있는 것은 개새끼라 호명되는 나이 많고 적음을 떠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수의 인간 새끼 아니 정확하게는 남자들이다. 개들은 죄가 없다. 그 날은 뉴델리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델리의 혼돈이 무섭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 "후마윤의 무덤"이라는 데를 꾸역꾸역 다녀왔다. 죽은 남편을 기리며 왕후가 지은 우아한 무덤 정원으로 느릿느릿 진입하는데 교복 입은 사내아이들이 꽤 보인다. 고등학생일까.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체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