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한 설명회가 끝난 뒤 일주일. 벽화봉사단은 지지부진한 회의와 소모적인 다툼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봉사단 인원의 상당수가 설명회 전, 심선생의 공공미술 수업과정에서 나가버린 터라, 남은 인원은 많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인원만이 남았다며 이제부터 진짜라던 심 선생은 회의마다 얼굴이 상하는 게 눈에 띌 정도였다. 남은 인원의 반 이상이 나가버렸고, 생활지원팀장도 흥미를 잃은 듯 우리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도 어딘가로 급하게 통화를 하며 지나갔다. 뭐 외부에서 보기에 나름 알찬 일주일이다. 지역 답사도 했고, 지역토박이 인터뷰도 했고,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몇 가지의 키워드도 잡아냈고, 나름 진행된 건 사실이다. “아니 몇 번이고 말하는데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요? 어르신들이 무슨 취향이 있..
꼬리를 내려뜨리기 시작하면서부터삵이 아파트 단지 내를 돌아다닐 때면다른 주민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았다. 작년엔 살이 많이 빠졌다. 일 년 동안 대략 20~30kg정도 빠졌으니 꽤 극적인 변화였다. 일부러 다이어트를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식사량이 갑자기 줄고 자전거라는 취미가 생기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직장 동료들은 ‘살을 어떻게 뺐냐’고 물어봤다. 심지어 날 모르는 사람이 우리 팀 동료에게 저 사람 살 어떻게 뺀 거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일부러 뺀 게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잘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나를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사회에서 다이어트가 여성에게 필수가 된 것은 따로 말하기 어색할 정도로 이미 오래됐다. 예전엔 접근성과 인식이 좋지..
애도는 사랑하는 도路 나는 형체 없는 공기, 캐스퍼 같은 유령으로저녁녘에 모락모락 연기 피어오르는 집집마다 있어요우리네들 엄마, 자매, 이모, 고모, 할머니한테 가서 물어봐요날 창조한 이의 영혼이 아직 날 놓지 않고 필요로 하는 한, 그 눈앞에 모습을 비추죠그리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날 붙잡지 않고 내려놓아서로 하늘처럼 자유로울 수도 있답니다 멋들어지게 우거진 숲 아래, 보배로운 보석 대지 어딘가의 안쪽, 거기 난 통로로 거슬러 올라가면 펼쳐지는 동굴 궁전창조자는 자신 안에 이것들을 힘으로 지녔죠난 그의 의식 저편,빙산의 몸통, 수면 아래 잠긴 웅장한 부분에 살죠한 때 그가 뱃속의 물로 나를 에워싸 품었었죠나는 형상으로 특정할 수 없어요, 어떠한 기운이나 바람 같죠오직 특별한 경우에만, 창조주의 의식..
그리고 영혼은 어느 여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최고의 강수량을 기록한 그 해 여름서부에는 농작물이 썩어갔고뒷마당의 체크무늬 테이블보는 빗물에 녹아내렸다빈 캠핑용 의자들은 빗물을 받아냈다나는 차량을 뚫고 어머니에게 가는 동안 도로 가장자리로, 주택들 뒤로 거무죽죽 떨어지는 라일락을 지나치면서딸로서 최후의 작별을 위해 무언가 생각해 보려 했다그러다 문득전에 들은 말이 떠올랐다인간의 몸은 대부분물로 되어 있다고 하던가남쪽으로 차를 돌리면서 다시 문득,우리 몸이 물의 도시라면그 도시에선 매일같이 물 분자들이 여행을 시작하겠지서로가 서로를 향한 여행을이곳 날씨로 보아 절대실패하지 않을 여행을―물이 잘라낸 가장자리를 따라 드러나는 바다공중으로 가 닿는 구름의 색조하나를 저장하고 다른 하나를 소환하는 리피강물의 부족에 ..
깨달음 입춘이 지났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땅도 갈고, 무엇보다 포도나무 전지를 해줘야 하는 시기이다. 엄마는 전지를 위해 회사에 3일 휴가를 내셨다. 그러나 정작 한 나무도 전지하지 못한 채, 휴가는 끝이 나고 말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엄마에게는 자식이 넷이나 있어서인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일이 많다. 큰언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 출산과 양육을 감당하다가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작년 봄에 갑작스레 아빠가 돌아가셔서 큰언니에게 소홀했더니, 최근 정도가 심각해져 엄마와 나는 시시때때로 서울을 오가며 조카들을 돌볼 수밖에 없었다. 개미처럼 살면 늙어서도 개미처럼 일하고, 베짱이처럼 살면 늙어서 노래 교실 다니는 거라고 누군가 그랬다. 할머니는 개미였고, 아빠는 ..
액체적 사랑의 윤리 사랑은 액체적이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상실한 때에 이 명제는 우리에게 더욱 선연해진다. 사랑은 변하고, 잡히지 않으며, 야속하게 흘러가버린다. 아무리 그것이 단단하고 분명하게 느껴질지라도 그것은 결코 응고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아폴리네르는 그래서 사랑을 흐르는 물에 비유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랑의 액체성은 인간 존재에 엄존하는 더욱 심원한 불협화음을 증언한다. 한편으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사랑을 필요로 한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 인간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상실의 필연성. 사랑은, 불안이라고 명명되는 이 근원적 절망에 맞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이다. 사랑으로 연대함으로써 인간은 언젠가 사라져버릴지라도 자신의 존재가 지속될 가치가 있다..
얼핏 보면 기괴하다고 볼 수 있는 안드로이드들이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그들의 부서진 신체 부위에는 최첨단 기계들이 덧붙여져 있었다. 시장에 쌓여 있던 기계와 부속들이 이들을 고치는데 쓰이는 듯했다. 보기 좋진 않았지만 기능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 듯했다. 오히려 부서져 고친 부위는 정교하고 섬세했다. 그들은 같은 기종의 안드로이드라도 해도 서로 같지 않았다. 새롭게 바뀐 신체 부위는 오히려 각자의 개성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냈다. 커다란 방의 사면에 즐비하게 늘어선 홀로그램에는 파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안드로이들이 홀로그램에서 파일들을 꺼내 바쁘게 오갔다. 그곳은 요즈음엔 거의 사라진 납골당처럼 보였다. - 저희는 조이를 찾으러 왔어요. 혹시 조이가 여기 있는 건가요? 나는 조심스레 캡틴에게 ..
형법 제269조 나는 무엇도 죽이지 않았다. 나는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엇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를 살리고 싶었다. 나는 무엇도 지우지 않았다. 그것은 심장 속에 존재했다.잊혀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시인 '강윤지'는페미니즘적 실천을 하며 살고 싶은 연극쟁이.
지구시 동물구 포유동물동, 고양이아파트에 사는 어느 삵은고양이처럼 꼬리에 늘 힘을 주고 다니는 대신에 오늘부터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살기로 결심했다. 몇 년 전 인공지능이 막 이슈화되기 시작했을 때 인공지능의 한계에 대해 기술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결정적 차이는 사물을 구별해내는 체계적 사고에 있다는 요지의 글이었는데, 예를 들어 ‘치와와와 닮은 초코머핀’과 ‘치와와’를 인간은 음식과 동물로 구분해낼 수 있지만 인공지능은 그 둘을 구분해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려면 머핀과 치와와, 치킨과 푸들을 구분해낼 줄 알아야 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사고방식의 특징 중 하나는 인지적, 직감적으로 대상을 비슷한 카테고리로 구분해내는 것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 나이트클럽에서 엘튼 존을 보았다 나는 애틀랜타의 Tongue & Groove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엘튼 존을 보았다. 언니는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헤어스타일은 반듯해 보였고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춤추고 있는 이십 대를 제외하면 누구도 저 인조 다이아몬드테 안경과 페이즐리 무늬 녹색 정장과 자줏빛 공단 셔츠와 잘 맞춘 넥타이를 놓칠 리 없었다 후텁한 공기 중 알코올 냄새는 마치 구두 밑창으로 흘러내려 질척거리는 것만 같았다 불행히도 그 무렵 나는 애인에게 차였고 마침 어떤 멍청이가 칵테일을 절반이나 나의 흰색 드레스에 엎지른 바람에 클럽에서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춤을 추면 기분도 풀리겠지만 나이트클럽은 그저 보는 재미로 그쳤다 엘튼 존이 휙 지나가면서 뿜어놓은 짙은 콜로뉴 향수에도 불구하고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