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곧 부양의무제가 전면 폐지된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마음속으로 안 들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부양의무제가 있는 나라에 산다는 건, 한 사람이 기초생활수급 등을 탈 정도로 충분히 가난해도, 그 사람의 부모·자녀· 배우자, 그러니까 가족(!)들이 충분히 가난하지 않으면 가난을 인정받을 수가 없단 얘기다. 다들 원가족은 자기가 고른 게 아니라서, ‘가족’ 사이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다. 그런 수많은 일들 때문에 가족이 연락을 안 하고 사는 사이가 된다면? 국가가 정보망을 동원해 한 사람의 가족을 찾아 내 ‘부양의 의무’를 고지한다. 월급과 재산을 차압해서라도 책임을 떠넘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양의무제는 원래는 국가가 했어야 할 일을 ‘비용절감’을 위해 가족에게 떠넘기는 데 이..
고양이 오늘도 먹고 살기는 바쁘다. 오전 일찍부터 과외를 하고 원고를 쓰려고 카페에 들어 와 앉았다. 다른 원고 하나를 마무리해서 보내고,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붙잡고 이 원고 아이디어 메모를 붙잡고 있는데, 바짝 붙은 옆 자리에 커플이 들어와 앉았다. 둘의 대화가 너무 시끄러워서 이어폰을 끼고 원고 작업을 계속 하려고 했지만, 오늘따라 이어폰을 안 가지고 왔다.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둘의 대화를 듣고 앉아 있었다. 여자는 하이힐을 신고 왔는데, 앉자 마자 발이 너무 아프다며 올리브영에 가서 신발에 붙이는 패드를 사다 달랬다. 남자는 “누가 그런 신발을 신고 오래?” 했지만 선뜻 카페 밖까지 나갔다 왔다. 이후 둘은 핸드폰을 들여다 보거나 여자가 화장을 고치거나 하며 별 내용 없는 대화를 계속 했다. 여자..
인체 모델일을 한다고 하면 다들 그게 무슨 일인지 되묻곤 한다. 그럼 적당한 선에서 드로잉 모델이라고 소개하고 판단에 따라 누드로 작업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옷을 벗는다고 하면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부끄럽지 않은지, 어떻게 용기가 났는지. 전편에 썼듯 나는 거울 앞의 내 모습을 볼 때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내 몸을 보고, 그리고, 옮길 때에는 전혀 다른 몰입감과 느낌을 받았다. 날 성적 대상이 아닌 내 몸 자체로 보고 그려주는 것. 내 몸과 내 마음이 주는 느낌을 그대로 옮겨주는 것. 그리고 그사실을 믿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들의 시선과 몰입감. 옷을 입고 있어도 나의 몸은 누군가에게 성적 대상이 되지만 오히려 옷을 벗고 누군가가 나를 그릴 때 나의 몸은 성적 대상이 아닌 그 자체..
항상, 이미 초과하는 서발턴 인도의 서발턴 여성은 두 번의 디페랑différend을 경험한다. 첫 번째 디페랑은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 같은 인도의 서발턴 역사학자들과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 등의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두 번째 디페랑은 영국인 남성과 인도 토착민 남성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렇게 서발턴 여성은 이미 초과되어 있고, 여전히 초과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 유럽중심주의에 맞서는, 또는 근대 이성 주체와 대결하는 ‘늠름한’ 남성들이 있다. 구하는 개량주의적 인도 공산당을 박차고 나와 19세기 후반 인도 농민 봉기를 연구하고,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농민들을 역사의 주체로 재현representation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들뢰즈는 푸코와의 대담 중에 “재..
오큘러스 오늘 아침 나는 죽은 여자의 라이브 포토 피드를 본다. 이틀 전 그녀는 자신의 심경을 업로드했다. 나는 차마 견딜 수 없다. 슬픈 사진 캡션과 여자의 검은 눈동자, 부글거리는 거품처럼 발광하는 얼굴의 공백을. 차마 견딜 수 없다. 이타카의 눈雪은 어찌나 퍼붓는지, 다리 위로 점점 차오르는 수위, 옷 아래 감춘 내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여기 있는 나를 볼 수도 없다. 이 불모의 토끼굴에서, 파괴된 사물들의 소란 속에서, 따분한 스캔들을 엿보는 구멍에서.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 동영상을 보고 있다. 치맛단 위로 스타킹이 말려 올라갈 때 속삭이는 남자. 얌전히 굴어, 자기야. 그래야 널 내 아내로 만들 수 있지. 죽은 여자는 어떻게 떨어졌을까. 누군가 잡아줄 손을 기다리면서, 누군가 바라봐줄 눈目을 기..
고민을 해 봐도 뭐라고 달리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여전히 그를 여기서부터는 ‘엄마’라고 적을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깝다. 가명을 쉽게 짓기도 저어되는데, 엄마의 이름은 설상가상 엄마의 아빠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고민 끝에 지은 이름 석 자를 불러주었을 때, 그만 사투리 화자들의 조음 능력 및 모음 변별 능력을 사유로 한 의사소통 상의 오류로 덜컥, 잘못 쓰여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이혼을 해내는 날 자신이 갖고 싶은 이름을 새로 갖기를 바라며 엄마를 섣불리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를 저어한다. 남의 선물 포장지를 뜯어버리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될까 봐. 여튼, 엄마에게 나 어릴 때를 물어 보면, 엄마는 늘 ‘갓난쟁이’였던 나를 어디든 안고 다니며 엄마가 말도 못하는 내게 얼마나 많은 말을 걸었는지..
사막의 건조함도 밤이슬이 내린 이불을 말리기는 역부족이었는지 이불은 눅눅했다. 사막의 밤은 추웠다. 두껍고 눅눅한 이불을 네 겹이나 덮으니 그런대로 하늘의 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사이에서 눈을 부쳐야 하는 처지였던지라 이불이나마 나는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파리 투어에 나를 포함해 세 명의 여행객이 있었고 나는 유일한 여자였다. 그 덕분에 사파리로 먹고 사는 자칭 사막의 왕자들은 함께 웃고 떠드는 중에도 나를 주요한 대화 상대로 삼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나는 세이프존에 있는 느낌을 받았고 동시에 또 조금 슬펐다. 나머지 두 명의 여행객은 잘 자란 교양있는 청년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그 중 한 명은 인도 출신의 매우 호방한 성격에 ..
나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화 되는 그 순간들이 모두에게 어땠는지 늘 궁금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언어로 쏟아져 나오는 그 순간들을 멀리서, 또 가까이서 응원하고 싶다. 두 번째 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하다가, 말하기에 대해 계속 얘기하면서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히 써 보려고 한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이 연재물 전체의 소재가 될 것이다.) 그저께는 국회에 다녀 왔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가정폭력전문상담원교육을 듣고 있고, 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국회 방문 일정이 있었다. 일정 중에 방문한 헌정기념관 한 켠에는 ‘발언속도가 가장 빨랐던 의원’의 이름과 얼굴이 붙어 있었다. 기념관의 안내문에 따르면 국회의원 평균 발언 속도는 분당 300자, 숙련된 속기사의 최대 속..
그녀가 나에게 친구 이상의 끌림을 느낀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렸냐면, 사람이 갑자기 변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여름 그녀를 포함한 몇 명의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항상 심각하고 말 수가 별로 없는 어두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전혀 달랐다. 잘 웃고 밝고 재미있는 농담도 잘 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내 스타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단다. 나는 그날 긴 머리를 짧은 단발로 자르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갔었다. 어릴 적 만화영화 세일러문에 나오는 머큐리를 좋아했었는데 그날의 내가 딱 그런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 뒤로 연락이 잦아졌다. 그녀는 나에게 사소한 선물들을 했고 여행을 가자고 했으며 자신의 지인을 소개팅 해주겠다고 했다. 웃기면서 귀여웠다. 주..
지면을 얻었으니, 나를 소개해야 한다. 이런 나를 도대체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자기소개는 매번 어렵지만, 그걸 하기 전에 먼저 이에 대한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자기소개를 어디서든 무리없이 비슷비슷하게 해 내고도 무탈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의 인격 수준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 이 사회의 강자, 권력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인자한 표정을 하고 있어도, 나는 좀처럼 그를 믿기 어려울 것이다. 또, 나는 자기소개 자리에서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에게 쉽게 나의 호의를 내어 주지 않기도 한다. (이런 나는 어떤 측면에서는 비사교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내 이야기를 이렇게 공개된 지면에 가감없이 풀어 말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종다양해서, 사람이 제대로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