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처럼 사는 삵에겐 오랜 친구가 있었다.강에서 사는 고래, 다람쥐인 줄 아는 기린,그리고 그들을 관리하는 사육사였다. 초끈이론에 의하면 차원은 11차원까지 존재한다. 1차원은 선의 세계, 2차원은 면의 세계, 3차원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세계이고, 알려진 바로는 4차원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라고 한다. 나는 5차원, 6차원은 어떤 차원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나름의 가설을 세워봤다. 1차원(선)과 1차원이 만나 2차원(면)이 되고, 2차원(면)과 2차원이 만나 3차원(공간)이 된다면, 4차원이 시간과 공간인 이유도 설명이 된다. 공간과 공간이 만나면 공간 안에 시간이 흐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5차원은 시간과 시간의 만남일 텐데, 애인은 직관적으로 5차원이 에너지의 ..
물이라 불리는 다리 난 열심히종이에 시를 썼다네 물이 고여 있는바닥 협곡 근처 웅덩이 위로 별들이 물고기처럼 배를 붙이고 미끄러지면 이렇게 써 내려갔지 …… 나는 산길을 지나서 라푸엔테의 잎사귀를 헤쳐 나아갔어 달을 보려고 했는데이미 늦었네 너무 오래전부터난 유리 바닥을 걷고 있었지 …… 그때는 집이 내 위로 무너지던 시절 아버지는 내게엄마를 끌어내라고 말했지 침대 위다른 남자와 같이 있다며― …… 자두나무에서열매가 떨어지듯가지 부러지는 소리 나이 더 들고 더 이상 두렵지 않아 내 목소리는 물처럼우물에서 길어 올려져 오래전 바람이 묻혀 있던 그곳누군가 늘 그곳에 있어 내 방으로 달려와묻고는 해, 너 괜찮니? (이필 譯) 아마도 시적 화자는 어린 시절 가정 폭력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의처증이 있던 아버지..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느낌을 갖게 된다. 좋다, 싫다, 별로다, 아무 느낌 없다, 매력적이다 등등. 긍정적인 느낌을 받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보면 끌리거나 호감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호감은 꾸며낸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매력을 억지로 뽐낸다고 되는 것도 아닌 듯하다. 그 사람이 내 안의 스위치를 눌러 불이 들어온다. 물론 다른 이들도 그 사람에게 내가 받은 것과 같은 호감을 가질 수 있다. 상대방의 마음이 결정적일 것이다. 상대방도 나를 매력적으로 보고 호감을 느끼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서로 주고받으며 점차 빠져든다. 관계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때도 있지만 극복하며 다가간다. 사귀자고 고백하기도 전에 이미 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첫 여성애인과 ..
고양이 나는 페미니스트 선언을 계기로 내가 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의 나를 생각해 보면, ‘돌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달에 통장에 들어 올 돈, 내년에 살게 될 집, 삼 년 후 내가 가 있을 곳, 이런 불확실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쉽게 죽고 싶은 기분이 드는 보면 지금을 딱히 멀쩡한 상태라고 하긴 어렵지만, 선언 이후의 내가 그 이전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 뭔가 이상 상태였다. 하지만 이게 단지 나 하나만의 서사가 아니었기에, 어떤 식의 의미화가 가능하다. 당시 인터넷에는 기존의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 글들이 넘쳐났다. 과거에 남들에게 밝힐 수 없었던, 또는 애매하고 불쾌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또는 아..
고양이 또 100시간을 보냈다. 자격증 두 개를 따려고 식구들에게 돈과 돌봄노동을 빚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딘가로 이동하고 앉아서 꼬박 200시간을 보냈다니 놀랍다. 모 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성폭력전문상담원교육코스를 수료하고, 이어 한국여성의전화에서 가정폭력전문상담원교육코스를 수료했다. 간단히 요약된 소감을 말하면, 여성가족부 홈페이지에 공시한 기관이라고 이 자격 코스의 수준과 내용이 다 똑같지 않아서 앞의 100시간은 정말 힘들었다. 뒤의 100시간은 그에 비해서는 즐거웠다. 하지만 온갖 스케줄의 틈바구니에서, 주 2회나, 저기 저 세상의 끝(처럼 내게는 느껴지는) 불광에 아침 10시부터 가서 앉아 있으려니 좀 죽을 맛이긴 했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도 나는 왜 이 자격증들을 따자고 마음먹었을까?..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아주 오래,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할 이야기다.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이기도 하며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중추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주제들처럼 시작과 끝을 한 번에 내버리면 아쉬움이 아주 많이 남을 것 같아서 하나의 주제가 끝날 때마다 한 조각씩 자유롭게 풀어놓을 예정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마무리될지 나도 모르겠다. 그저 ‘나’라는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싶다는 연재의 시작처럼 내가 왜 개인주의자로 스스로 정체화했고 왜 개인주의를 선택했는지, 내가 생각하는 개인주의는 어떤 것인지 천천히 풀어낼 생각이다. 어릴 적 나는 거울 속의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왜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생겼을까, 내 성씨는 왜 위 씨일까. 유난히 발이 컸던 나는 6..
유산 우리 어머니가 고독을 발명했을까? 아니면 고독이 누군가를 어머니로 만들었을까? 우리는 침묵을 아버지로 두었을까? 아니면 이 침묵을 변명하려고 보고만 있는 걸까? 우리 형제들을 위해, 그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는 기도는 헛된 짓일까? 만약 우리가 어머니보다 혹은 어머니를 위해 먼저 늙는다면? 우리는 누구의 딸일까? 우리 할아버지 세대를 다들 ‘1월생 아이들’이라고 불렀지. 식민지 개척자에게 줄 세워져, 키 높이로 출생연도를 부여받았던 아이들. 아무 대답이 없네. 언제 태어났는지 자신도 모르는 남자들과 사진 몇 장 보고 결혼한 여자들. 고향 떠난 자식은 연애를 하고 싶어 했지. 잘못된 말을 더듬더듬거리는 딸을 둔 여자들. 우리는 그들에게서 생겨났지. (이필 譯) 이 시가 실린 시집의 제목 “1월생 ..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두 달이 넘는 시간을 꼬박 매달렸건만, 일정은 꼬이기 일쑤였고, 일정이 맞아떨어지면 관계가 꼬였다. 박여사와 수미씨와의 말다툼으로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덕기 아줌마가 일찍 도착해 회의실 중앙에 보따리를 풀었다. 매번 음식 싸오는 사람은 덕기 아줌마 밖에 없었다. 덕기 아줌마의 혼합잡곡 때매 난리가 났다지만, 정작 아줌마의 수제 깨강정 맛은 일품이었다. 오도독 오도독. 회의실에는 고소한 깨강정 소리만 가득했다. 곧이어 박 여사가 들어와 “아이고. 솜씨도 좋아 맨날 이게 뭐람” 하며 깨강정을 한웅큼 집어들었다. 위층에서는 오전 에어로빅 수업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벽을 타고 우리에게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좋을 때다. 관절 성할 ..
고양이 ‘페미니즘을 배워야 아는 것인가, 아니면 여자로 태어나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오래 고민했다. 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쓰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자. 우리 모두는 자신의 위치에 따른 당파성을 가지고 있고, 가져야만 하고, 다만 자신이 인지하는 세계가 얼마나 편협한지를 잘 인지하고 있는지가 문제라는 것. 그래서 중립 지대에서 답을 내릴 수 있는 판관 같은 건 세상에 없다는 것. 이것들이 내가 지금껏 페미니즘 정치학에서 배워 온 바다. 그러니 내 위치부터 밝히자.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이 세대의 어떤 페미니즘이 너무 쉽게 ‘더 가진’ 사람들의 것이 되어 온 현상에 늘 불만을 가져 온 쪽이다. 내 입장에서 볼 때 성별이 여자인 것 빼고는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페미니..
나는 퀴어다. 이성애를 벗어난 섹슈얼리티를 실천하고 있는 퀴어다. 나에게 섹슈얼리티는 누군가와 애욕을 포함한 사랑하는 감정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성적 지향 말이다. 따라서 이성애를 벗어난 섹슈얼리티라는 말은 상대방의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다. 스무살 중반까지 나는 내가 이성애자인줄 알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스무살 중반에 퀴어임을 깨닫고 퀴어로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각성하기 위해서는 두 단계를 필요로 했다. 첫 번째는 남성이 아닌 다른 성별의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었다. 한국 사회는 나에게 에로스적 사랑이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만 가능하며 동성이나 그 외의 관계는 ‘극소수’라고 가르쳤기에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내가 소수자일 것이라 생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