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과가 아주 좋아요. 기적적일 정돕니다. 환자분께서 의지가 강하셔서 그랬는지…… 워낙 체력도 좋았고요.” 눈이 시렸다. 의사는 열성적으로 엄마의 수술 경과를 설명하고 있었다. 엄마는 암세포가 자란 가슴을 거의 절반을 도려내고 결국 이겼다. 엄마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는 과학 기술이 당신을 구할 것이라고, 발전한 현대 의학에 힘입어 자신은 암을 이길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현실이 되었다. 재발 위험이 높으니, 로 시작되는 고까운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은 내 몫이었다. 퇴원 일자를 받았다. 약 열흘 후였다. 피 검사나 소화 기능의 경과를 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엄마는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그 파리한 얼굴에 갑자기 무지개가 드리운 것처럼 밝은 표정으로 ..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엄마가 가스레인지 켜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계란 하나와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두었다. 나는 왼쪽, 엄마는 오른쪽에 서 있었고 먼저 스위치를 잡아보라고 했다. 이윽고 내 손 위에 엄마 손이 포개졌고 돌리는 법을 배웠다. 이때 내 손을 쥐던 엄마의 힘은 무척 강했고 그래서 내심 놀랐던 기억이 있다. 힘을 조금 주고 돌린 다음 몇 초가 흐른 뒤 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불 조절을 하면 된다고 끄는 법은 쉽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식용유를 두른 팬에 계란을 올렸고, 계란프라이는 그렇게 내 인생 처음으로 만든 요리가 되었다. 그 생애 첫 요리의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불을 다루는 것이 살아생전 처음이었기에 무척 긴장하고 두려웠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겁이 났던 탓에 ..
은수 님에게 요즘 날씨가 많이 더워진 게, 여름이구나 싶어요. 전 여름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여름만의 붉고 푸른 에너지를 구경하는 건 좋아해요. 여름 하면 선풍기를 틀어놓고 TV를 보면서 수박 먹는 풍경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전 길치라서 길을 자주 잃곤 하는데요. 제 어릴 때 뜨거운 여름날 길을 잃어서 헤매다가 가파른 육교를 오르던 중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찔끔 나왔는데, 그때 수박을 먹는 그 장면이 머릿속에 가득했어요. 가끔 힘들 때는 종종 그 육교를 오르는 꿈을 꿔요. 여름밤의 추억들도 떠오르네요. 홍대 놀이터2(라고 우리는 불렀던 공원)에서 친구들과 밤을 새우던 기억이요. 그곳은 바로 제 집 앞에 있어서 저의 주요 서식지였죠.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의 추억이 가득해요. 돈 없는 우리의 만남의 장소였..
모든 존재는 실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익혀가기 나름입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기는 발을 떼고 제대로 걸을 때까지 약 3천 번 넘어져야 비로소 걸음마를 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대략 3천 번의 실수를 통해 드디어 성공에 이르는 것이지요. 성장에 있어서 실행과 시행착오, 실패는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직관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최고경영자는 평균 2.8회 실패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글로벌 창업시장에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은 정설로 통하는데, 실패를 용인해주는 문화에는 창업해서 결국 실패하더라도 거기서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통해 성숙해진 창업..
이 글은 올 5월에 열렸던 오뚜기 제1회 푸드에세이 공모전에 투고했다 낙선된 작품을 다루고 있다. 푸드에세이 주제는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로, 자사 제품이 아닌 타사 제품에 관해 이야기해도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 나는 곧바로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는 사실 거짓말이다. 아무리 그랬다고 한들 타사 제품 이야기를 하는 글은 공모전에 뽑히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도 거짓말이다. 사실 나는 처음 그 공모전을 발견하자마자 오로지 이 생각에 점령당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이건 써야지.”라는 생각이었다. 왜냐면 수자가 10년 넘게 일해온 곳이 오뚜기니까. 수자는 마트에서 일하며 가끔 행사를 맡고 교육을 하러 이른 새벽 집을 나섰었다. 그러므로 집으로 가져오는 제품들도 모두 오뚜기. 그런 환경 속에서 내가..
오랜만에 놀러간 서점 한 곳이 이번 주말부로 문을 닫는다고 했다. 따져보니 나는 그 서점 문이 완전히 닫히기 삼일 전 방문한 셈이었다. 책으로 만든 터널 인증샷으로 유명했던 곳. 식당과 서적이 한데 모여 있어 좀 의아했던 곳. 그럼에도 예쁘고 힙한 것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 종종 찾아갔던 곳. 오픈 당시에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을지로의 서점이었다. 곧 문 닫을 서점 안은 스산했다. 불 꺼진 가게들과 출입금지 테이프. 한 곳에 앉아 사진 매거진을 좀 읽다 나왔다. 와중에도 곳곳에 마련된 소파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언제 문 닫아요? 다른 지점은 어디 있나요? 아. 아쉽네요. 매대를 구경하는 척하면서 누군가 점원에게 묻는 소리를 몰래 들었다. 일하던 회사의 부장님이 그 서점에서 찍어온 사진을..
삶을 즐길 시간 벌써 타오르는 듯한 삶은 저녁을 향하여 기울어가 너의 젊음을 들이쉬렴, 시간은 짧아 포도밭에서 양조장으로 가는 시간도, 어스름 새벽이 저무는 하루로 가는 시간도. 주위의 향기들에, 일렁이는 움직임들에 네 영혼을 계속 열어둬, 노력을, 희망을, 긍지를 사랑하렴. 사랑을 사랑해봐. 그게 오묘한 거야. 살아있는 마음들이 은둔의 집으로 얼마나 많이 떠나버렸나, 꿀도 마시질 않고 이 땅의 아침바람도 느껴보지 않은 채, 얼마나 많이 떠났나 이 밤에 검은 딸기 뿌리와도 같은 이들은, 태양이 펼쳐졌다가 접혀드는 이 삶을 맛보지도 않았지! 그들의 두 손 가득했던 금과 본질 쏟아내질 않았어, 그들은 지금 여기에 있지 우리 잠드는 이 그늘 속에 꿈도 활력도 없이. 너는, 살아가, 끝없이 나아가, 희망과 전율..
4. 인생의 고난시기 혹은 실패경험과 그 극복과정을 기술하시오. (500자 내외) 나는 도무지 이 질문을 참을 수가 없다. 한숨을 쉬며 노트북 화면 탭을 번갈아 클릭했다. 쓰다 만 자소서 화면이 벌써 일곱 개였고, 나는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다른 자소서 탭으로 옮겨갔다. 그게 벌써 일곱 번째라는 뜻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처음 썼던 화면으로 돌아갔다. 시집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였다. 대체 신입사원을 뽑으면서 왜 그 사람의 고난과 실패를 알고 싶어 하는 걸까? 그게 그렇게도 궁금할까? 다른 사람을 처음으로 만날 때 그 사람의 고난과 실패부터 알고 싶어 하는 건 정말 고약한 일이다.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의 고난과 극복 경험이 궁금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경험을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나는 벌레를 보면 습관처럼 가슴이 철렁한다. ‘생김새로 살아 있는 존재를 무서워하면 안 돼.’, ‘이 두려움은 전부 학습된 결과일 뿐이야.’ 하고 스스로를 세뇌해 보지만, 다음에 또 다른 벌레를 마주치면 흠칫 놀라고 소리를 지른다. 심지어, 벌레를 죽이려고 손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런 행동은 말 그대로 자동인형처럼 튀어나왔다. 비건으로 생활한 이후에도 한참 그 버릇을 떨쳐내지 못했다. 다행히, 새집으로 이사를 온 후로는 벌레를 덜 죽이게 되었다. 일단 새로 얻은 집은 이전에 살던 곳에 비하면 신축이고 깨끗해서 집 안에 벌레가 들어오는 일 자체가 없었다. 기껏해야 날파리 정도가 눈에 보였다. 이따금 집게벌레나 개미가 외부에서 들어오기도 했다. 내 시야를 방해하는 작은 날파리는 손부채질을 해서 다른 곳으로 ..
하드커버로 된 표지를 열자 노란색 간지가 드러난다. 큰딸 이름이 삐뚤빼뚤 커다란 글씨로 적혀 있다. 거기엔 글자들의 세계에 처음 편입되어 이제 막 제 손으로 그것을 쓸 수 있게 된 아이 마음의 환희가 담겨 있다. 서지정보가 새겨진 페이지를 보니, 이 책의 초판 1쇄 발행일은 1999년이고 2007년 36쇄 발행까지 이뤄진 것으로 나와 있다. 큰딸이 6~7세 되던 해에 구입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책장을 아이와 함께 넘기곤 했던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다만 눈이 트일 정도로 환한 톤으로 그려진, 또 아이가 간지에다 써넣은 글씨만큼이나 삐뚤빼뚤한 그림체에 끌렸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밝은 톤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책을 금방 덮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