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탈진실 시대의 진실연대자들 회원) 이 책의 목적은 존재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의미심장하고 파격적인 캐스팅을 감행하는데, 새로운 존재론인 존재자론을 연출하며 그 주인공으로 바로 ‘객체’를 섭외하는 것이다. 모든 좋은 책의 본래 목적이 진실 찾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저자의 캐스팅은 파격적인 동시에 무척 영리한 것이기도 하다. ‘객체’는 그동안 수많은 철학책 속에서 가장 왜곡되고 은폐되고 또 소외된 존재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중엽, 맑스가 ‘프롤레타리아’를 통해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수많은 진실을 밝혀냈듯이 이 책의 저자 레비 R. 브라이언트는 ‘객체’를 통해 그동안 가려졌던 존재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다. 존..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고 있을 때도, 외로움에 지쳐 죽고 싶을 때도, 내가 짜증을 부릴 때도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준. 항상 얼굴을 마주하며 잠들고, 낮잠을 자고 있으면 어느새 내 품에 안겨 있는. 품 안에 얼굴을 숨길 때 닿는 코의 차가운 감촉이 기분 좋은. 나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해 보이는. 너는 나의 친구고 가족이고 분신 같은 존재야. 14년을 함께한 내 낡고 오래된 사랑의 주인공 나의 고양이 미쉘. 나는 고양이를 무서워했다. 어릴 때 무심코 번쩍 안았던 고양이가 등에 손톱을 박고 떨어지지 않았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 즈음이었을까.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길 한가운데에 앉아 나를 보고 울었다. 나를 향해 계속 야옹야옹 우는 게 난 너무 무서워서 그 넓은 길목..
“엄마, 어떡해? 나한테 번호 달래.” 여기서 문제. 수자는 어떤 대답을 했을지 고르시오. ⓐ 미안한데 내가 얘 엄마거든요. ⓑ 뭘 줘, 빨리 가자. ⓒ 기타 (이 항목 선택 시 아래 댓글에 자유롭게 생각을 적어 주세요) 지난번 냈던 문제의 선택 항목이다. 의외로 댓글이 많이 달리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은근슬쩍 물어본 결과(웃음…) ⓑ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나라도 그랬을 거다. 그 자리에 있던 나조차 당연히 ‘수자가 이런 걸 받아들일 리 없지…’라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런데, 실제 대답은 황당했다. “몇 살인데요?” 수자의 물음에 그 남자는 나이를 이야기했고,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수자는 홍홍홍(이렇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말 저 단어 말고는 그 웃음을 표현할 수 ..
2021년의 5월이 시작되었다. 벚꽃은 진작에 져버렸지만 대신에 형형색색 봄꽃을 마음껏 볼 수 있어 산책하다가 자주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일교차가 심하진 않지만 해가 지면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해 국물이 있는 저녁을 차리게 된다. 오늘은 저녁으로 계란국을 끓였다. 양파 껍질, 말린 표고버섯과 대파 흰 부분을 넣고 육수를 내서 잘 풀어놓은 달걀과 가지런히 썰어 놓은 양파 반 개를 넣고 간은 심심하게 끓여 몸을 따뜻하게 덥혔다. 다 먹어갈 때쯤 국그릇에는 양파 몇 조각이 남아있었는데 그걸 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양파보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인가? 살려는 의지가 있는가? 생명의 힘이라는 게 나에게 있는가?’ 비가 오는 날에도 나갈 정도로 산책을 좋아한다. 풀을 보고 하늘도 쳐다보다가 ..
향기 내 마음은 떠다니는 향기들로 가득한 궁전 이따금 내 기억의 주름에서 잠드는 향기들 그리고 숨어있던 꽃다발들이 불현듯 깨어나고 향주머니가 옷장의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듯 스며드네 나의 사라진 쾌락들의 수의를 들어올려 슬픈 붕대들을 해방시키자... 섬세한 힘으로, 마음을 환기해주는 신들인, 향기들이여, 그대들의 풍요로운 향로들이 내 쪽으로 연기를 뿜을 수 있게 내버려 둬주시기를! 4월의 꽃냄새, 베어진 풀이 말라가는 계절의 내음, 축축한 방들에 피어오르는 첫 불길의 향수, 오래된 집들에 퍼지는 아로마, 그리고 빳빳한 벨벳 벽지에 몽롱해지고 빵 굽는 화덕에서 새어나오는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맛, 어둠의 모음집으로 나른하게 만드는 향, 나뭇가지의 냄새를 일깨워주고 탄식하게 하는 흐릿해진 우리 젊은 사랑의 기억..
학부시절 여성학개론을 강의하시던 교수님께서는 소신과 가치관을 삶으로 확장시키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 깊은 분이셨어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본인의 박사학위를 위해 유학을 결심했고, 출산시기를 자신의 커리어에 맞춰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하셨습니다. 학령기에 다다른 자녀가 하교 후 집에 혼자 있으면 정서상 좋지 않다는 주변의 우려(라 쓰고 오지랖이라 읽읍시다)를 무시하고 경력을 빌드업하면서 ‘아이도 부모의 사정에 적응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눈을 반짝이며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흉자로서의 정체성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남편 되시는 분이 참 대단하고 배려심이 많다’느니, ‘교수님 자녀분은 어려서부터 참 외로웠겠다’느니 하는 생각도 했었네요(먼 산). 졸업하고 나서부터 이상과 현실..
나는 화장도 거의 안 하고, 머리도 짧으며, 펑퍼짐한 옷을 주로 입고 다닌다. 집에 있는 옷들은 전부 검정. 분명 다른 티셔츠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나는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이는 무난하고 시커먼 옷만 사들이는 버릇이 있다. 살이 쪄서 입지 못하게 된 옷이 있으면 살을 빼고 입는 게 아니라, 주변에 사이즈가 맞는 친구나 가족에게 입으라며 주거나 더 큰 사이즈가 구비되어 있는 쇼핑몰을 찾아 다시 옷을 주문한다. 이렇게 살아온 지는 아마 3년 정도 되었을 거다. 사람들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만나게 된 것은 작년부터라, 대부분은 내가 어릴 때부터 숏컷이었으며 지금 모습과 다를 바 없을 거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과는 외관부터 성격까지 완..
나는 오늘부터 당신을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치열하게 싫어하기로 했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가 있다면 합당한 것일까? 누군가를 싫어할 때마다 혹시 나의 피해의식이나 자격지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오곤 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려 해보아도, 아니 한 걸음 떨어져서 생각하니 당신을 싫어하는 마음이 오히려 타당해지거나 더 커지곤 했지만 정말 객관적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정신적 결함은 자격지심이라고 볼 수 있다. 피해의식도 많다. 자격지심과 피해의식, 그 둘로 인해 파생되는 질투와 선망 그 사이, 자괴감이 불러오는 자아 비대와 자기혐오, 이 둘은 내가 자의식을 갖기 시작한 10대 이후부터 줄곧 내 인생과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불편하고 ..
‘덕질의 끝은 부동산’이라는 말을 요즘 따라 심심찮게 발견한다. 무언가를 좋아하다 보면 그것과 관련된 재화가 쌓이고, 그 재화를 감당하려면 넉넉한 사유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화분에 담긴 식구들이 늘어날수록 부동산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다. 충분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2단 선반은 비좁아졌다. 내가 원하는 식물을 모두 사들이면 베란다에 있는 인간의 물건들을 모조리 빼내야 할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베란다가 있는 집을 구한 것만으로도 기적으로 느껴졌는데, 지금은 아담한 일자형 베란다 공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땅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땅으로 재산을 늘리거나 권리 혹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기괴한 일이다. 누군가는 땅으로 돈을 벌지만, 누군가는 그 땅의 흙 한 줌 챙기지 못하고 쫓겨난다...
목이 부러진 새였다. 목을 아래로 꺾고 노란 다리를 하늘로 치켜든 독특한 자세로 흙먼지가 가득한 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올리브색이 감도는 갈색 깃털이 아직 보드라워 보였다. 손을 가져다 만지면 금세 일어나 담장 너머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가만히 새를 바라봤다. 감긴 것인지, 이미 부패해버린 것인지 모를 눈, 꽉 다문 부리, 회색 머리와 솜털 같은 흰 배, 엊그제 먹었던 야식과 닮은 샛노란 발까지.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글을 떠올렸다. 유리창 충돌 사고와 관련된 글이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가만히 새를 바라봤다. 그 글의 주인은 따뜻한 어딘가로 새를 옮겨주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릴 적 시체를 만지는 느낌이라며 눈을 감고 친구의 두 손가락을 만졌던 기억이 되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