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체(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과연 여자들에게 좋은 것일까? 내가 농구 하는 것, 스포츠 시장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는 것, 공공장소를 점유하기 위해 부딪치고 맞서 싸우는 것, 학창 시절 운동장의 기억을 현재의 시간으로 불러오는 것 등 나의 고유한 경험을 말하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을 추동하는 동시대의 여자들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에세이는 응당 보편성을 획득하거나 진정성을 품거나 또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을 셀링 포인트로 삼아야 하는데, 이 연재는 세 가지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글은 누가 읽는 것일까? 주변을 둘러보면 농구 하는 친구들은 정작 내가 쓰는 글에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스포츠라면 하는 것보다 보는 것에 가치를 두는 대학원생들이 읽..
삵은 여행을 떠났다 하루에 3만 보씩 걷던 때가 있었다. 재작년 가을 무렵 스페인에서였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떠난 스페인에서, 되지도 않는 영어를 하며 그렇게 혼자 온종일 걸어 다닌 것이다. 혼자 여행을 자주 가던 건 아니었다. 스페인 이전에 혼자 떠나본 여행이라고는 당일치기로 두물머리를 다녀온 것뿐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떠난 건지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유럽 비슷한 곳을 가고 싶어서 마카오를 가려다가, 그냥 진짜 유럽을 가버렸다. 겁도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혼자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을 그렇게 정신없이 다녀왔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유명한 건축물도, 맛있는 음식도 아니다. 노상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던 기억이다. 이국적인 풍경과 내 귀에서 흘러나오는 내가 ..
아마추어 농구선수로서 코트 위의 나는 메인 캐릭터라기보다 부캐에 가깝다. 김신영의 ‘둘째 이모 김다비’나 박나래의 ‘조지나’같이 인종, 계급, 세대 등 특정 조건들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본캐와 부캐에 따라 주로 사용하는 얼굴 근육, 목소리 톤, 단어 선택, 그리고 걸음걸이 등 크고 작은 습관들의 차이가 발생한다. 캐릭터를 넘나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간의 강박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하고, 상대방이 호감을 가질 것이라는 믿음, 일종의 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관계 맺기에 주저하지 않고 참여하려 든다. 어떤 공간에 놓였는가, 누구와 어울리는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치고 빠지는, 또는 새롭게 획득하는 습관들은 공동체 안에서 반복되면서 쌓여간다. 예컨대 철학자의 저서를 발..
암삵의 삶을 연재한 지 1년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라는 개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덧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장과 장을 연결하는 ‘개인주의자적 삶’ 시리즈에서 나는 ‘나’라는 개인의 면면들을 연결하고 통합하고 싶었다. 그게 잘 되어 왔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개인주의자적 삶’을 쓰기에 앞서 지금까지 써 왔던 ‘개인주의자적 삶’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각각의 이야기마다 그래도, 적어도 개인주의에 대한 내 생각이 담겨 있긴 한 듯 같다. 그 사실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다르다는 사실’, ‘언어 뒤에 감춰진 불확실성’, ‘폭력의 정체’, ‘주관적인 사랑과 삶’, ‘생각과 표현’. 지금까지 개인주의자적 삶을 통해 다뤄온 이야기들이다.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서..
“영리한” 증언자와 “영리하게” 연대하기 책을 읽는 동안 나를 압도한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윤지오 씨 말은 100% 진실일까요?”라는 김수민의 포스팅이 있었던 2019년 4월 16일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윤지오의 증언, 즉 그의 ‘메시지’를 끝까지 따라가는 일을 포기한 채 윤지오라는 ‘메신저’ 쪽으로 시선을 틀어버렸다. 윤지오라는 사람의 인격은 어떠한가, 하는 물음에 지배당한 것이다. 그렇다고 윤지오 증언이 갖는 의미 모두를 부정하는 방향을 택하지는 않았다. 그가 설령 순수하지 않은 메신저일 순 있다고 하더라도 그 메시지의 무게와 중차대함까지 부정될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피로를 느꼈다. 윤지오를 응원하던 사람들이 그와 맞잡았던 손을 놓고..
* 계집애 던지기(throwing a girl)는 Iris Marion Young의 「Throwing like a girl」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0)에서 ‘like’ 빼고 베껴왔다. 공을 던지는 최초의 기억을 떠올린다. 제 몸만 한 탱탱볼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어른들의 박수를 받는 유아 때의 사건 말고, 그러니까 내가 소녀였을 때 유효타를 날렸던 최초의 공놀이를 떠올려본다. 점심시간 이후의 수업은 언제나 졸렸지만 체육 시간에는 오히려 에너지 넘쳤다. 체육부장이었던 내가 준비 운동 동작과 함께 하나 둘 셋 넷 선창하면 반 애들이 둘둘 셋 넷하고 반복하는 것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손목, 발목부터 허리와 골반을 골고루 비틀고 나면 관절이 열리고 무엇이..
아리아가 원한 건 약간의 이해와 순수하고 달콤한 사랑, 그리고 약간의 겸손이었다. 사춘기 소녀의 허세와 외로움으로 가득한 힙스터 영화 제멋대로인 유명인 부모의 크고 작은 학대와 무관심 속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아홉 살 소녀 아리아. 는 프랑스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이탈리아인 자녀들이라는 설정부터 복잡한 영화다. 감독의 뒤죽박죽한 취향과 혼란스러운 연출 때문에 영화를 차분히 감상하기가 쉽지 않지만, 묘한 조화로움이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런 와중에 아리아 역할을 맡은 배우의 담담한 연기는 아리아의 외로움을 부각시킨다. 영화의 원제는 Misunderstood, 즉 ‘제대로 이해 받지 못하는, 오해를 받는’이라는 뜻이다. 영화는 아리아와 가족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상황을 보..
삵은 자신을 위한 생각을 하고 싶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는 것은 어렵지만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느끼는 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 나의 몸과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나’라는 존재를 느끼는 것. 감정과 몸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에 ‘나’를 느끼는 것은 나의 감정과 몸을 느낌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나 내가 ‘나’라는 당연한 그 느낌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다. 내게는 조울증 말고 또 다른 병명이 있다. ‘경계성 인격장애’가 그것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만성적인 공허감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흐릿한 자아감과 연관되어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느낌이 덜하다 보니, 그 자리를 공허가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건 스물세 살..
스포츠의 타임라인은 갖가지 예측을 뛰어넘는 플레이의 출현이 쌓아 올려진 레이어라는 생각이 든다. 스포츠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정동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면서도 동시에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결과가 뻔한 경기보다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한 경기의 결과를 좋아하고, 또 그보다는 강팀이 방심한 틈을 약팀이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보란 듯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포츠의 순간들에 열광한다. 2019 NBA 파이널에서의 배팅률은 골든스테이트가 약 1.5, 휴스턴 로키츠가 약 3.5로 나왔지만 결과는 휴스턴의 승리였다. 예측 가능하지만 결코 불확실한 스포츠가 가진 자질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특히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의 경우 경기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올해의 우승부터 프로 선수의 연봉..
삵은 마음으로 생각을 비춰보았다. 길에는 이정표가 필요하다. 그리고 가로등도, 그 길을 걷는 나 자신도 필요하다. 경험이라는 이정표가 비춰주는 생각이라는 길은 때론 캄캄한 어둠이 내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 일쑤다. 이를테면 도저히 앞날이나 지금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경험을 겪었을 때, 혹은 생각의 여력이 없을 만큼 다양한 경험을 쏟아지듯 겪게 됐을 때. 어린 나는 압도적인 경험 앞에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캄캄한 밤길을 헤매듯 헤짚으며 걸을 뿐이었다. 열네 살의 일도, 열아홉 살의 일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럴 땐 가로등을 켜면 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길을 비춰볼 수 있는 불빛. 내게도 가로등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내게 가로등이 있다는 사실..
한 동안 테일러 스위프트의 만 들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생기면 질릴 때까지 듣는데 이번엔 이 노래였던 거다. 심장 박동처럼 쿵쿵 울리는 드럼 비트에 Only the young can run,하고 언뜻 알아들을 만큼만 어려운 후렴구가 마음에 들었다. 이전의 테일러 노래보다 낮게 읊조리는 느낌이네,하고 생각할 즈음 이분 남짓한 짧은 노래는 끝난다. 그들은 널 도울 수 없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시작이야. 오직 한 가지만 우릴 구할 수 있어. Only the young. 노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인 다큐멘터리 를 보고 나서야 온전히 이해됐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20대에 이미 그래미상을 거머쥘 만큼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진 팝가수지만, 그보다는 헐리우드의 수많은 남자들과 데이트를 즐긴다는 종류의 가십거..
이런 시도들은 사랑에 대한 형태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개인 단위의 운동인 동시에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응시하고자 하는 작은 꿈틀거림이었다. 개인이 스스로를 알아가고자 하는 서사는 언제나 도전적이고 치열한 아름다움을 동반하지만, 이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행동 저변의 못난 이유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내가 포용할 수 없는 많은 룰들이 두려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해야 하는 독점 연애의 룰, 자식이 이유 불문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정상 가족의 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많은 대상화-침해의 룰에서 탈출하고픈 마음이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룰의 바깥으로 벗어난다고 해도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사..
“조 스텝, 사람들이 매장이 멋지다고 난리야. 막 와서 사진 찍어가고 그러네, 하하. 조만간 이 매장을 프랜차이즈로 확장하려려고. 조 스텝이 확장되는 매장 관리나 오픈 준비 이런 걸 좀 맡아주면 좋겠는데, 어때요? 회사에서 차도 주고, 기름값도 주고, 법인 카드 주고 그럴 건데. 그러면 조 스텝은 전국에 오픈되는 매장에 가서 물건 배열해주고, 포스 사용 알려주고 그러는 거지.” “우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좀 더 구체적인 제안을 주셔야 저도 고민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차랑, 법인 카드, 월 200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네, 그럼 생각해보고 말씀드릴게요.” 정말이지 사람의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 나만 해도 이렇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틈틈이 농사를 짓고, 집 안팎을 살피는 삶을 살..
가지지 못한다. 가지지 못함, 소유 개념이 부재하는 관계 맺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연애 이야기만큼 적당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연애야말로 소유욕이라는 것이 가장 철저하게 투영되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소속되는 것과 소유되는 것은 분명 다른데, 연애 관계에서만큼은 이것이 자주 혼동되거나 혼용되는 것 같다. 다들 그런 얘기를 하니까 말이다. 넌 내 것, 난 네 것, 대부분 그러면서 연애를 하니까 말이다. 나의 첫 연애는 열일곱 살 때였는데, 나는 그때부터 그런 말을 하지 못하는 애였다. 그때는 폴리아모리 같은 개념조차 몰랐는데도 그랬다. 폴리아모리(흔히 비독점적 다자연애라고 번역한다. 나는 ‘다자연애’보다 ‘비독점적’이라는 텍스트를 더 강하게 읽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개념은 좀 더 자라..
삵은 스스로 지도를 그리는 게 서툴렀다. ‘생각’하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4차원 식구 중 한 명, 사랑하는 삶 2편의 주인공, 암삵의 삶 로고를 그려준 사람. 2020년 3월 24일, 그 친구는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갔다. 갑작스럽게, 그러나 급하지 않게 벌어진 일이었다. 나와 하루를 따뜻하고 조용하게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그렇게 되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급하게 떠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루를 조용히 함께 보낸 뒤라 그런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친구의 배려였다는 생각은 든다. 늘 내게 따뜻한 숨 같았던 사람. 한없이 아껴주던 사람. 마지막까지 그 친구는 나를 배려했다. 나와 하루를 잘 보내고, 뒤늦게 발견되어 내가 속상하지 않게 집으로 가는 길..
나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공공장소에서 애정표현을 멈추지 않았다. 애인의 볼과 머리카락에 뽀뽀하고 허리에 손을 두르고 포옹을 했다. 점점 면역이 생기는지 애인도 내 스킨십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지 두려움이 들 때마다 나는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성애 커플과 우리는 다른 점이 없는데 왜 내가 행동을 삼가야 한단 말인가. 애정표현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것은 혐오자들에게 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숨고 싶지 않았다. 이성애 커플들이 그렇듯 우리의 사랑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를 의심하고 부정한 후에 나온 것이었다. 담금질 한 후 얻은 확신이었기에 굳건..
동그란 사람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터전을 풍성히 가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주어진 삶의 조건을 인정하고 나아가 극복하려는 자세이며,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신뢰하고 긍정하는 태도가 아닐까? 우리는 이런 사람을 흔히 ‘부지런한 사람’이나 ‘살림꾼’ 등으로 부르곤 한다. 여기에서 언어가 그 의미를 축소해버리는 한계를 경험한다. ‘부지런한 사람’이나 ‘살림꾼’으로 그 존재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니 말이다. 지인 중에도 자신의 삶을 부지런히 일구어 나가는 사람이 여럿 있다. “밤이 엄마”는 그중 한 사람이자, 단연 으뜸이라 여겨지는 사람이다. 그녀를 알게 된 건 두 해 전 사회학 세미나에서였다. 초롱초롱한 눈, 둥근 얼굴과 광대, 또 둥그런 코와 입, 아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동글동글했다. 심지어..
산타바바라에서 쉐어하우스를 운영하는 도로시아는 사춘기 아들인 제이미를 혼자 키우며 지낸다. 도로시아는 쉐어하우스 메이트들과 사생활을 공유하기도 하고, 이웃 사람들을 초대해 조촐한 파티를 열어 소통을 이어가는 등의 외향적이고 관계지향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외부인에게 이렇게 친절하고 다정하며 누군가와 관계 맺는 데 아무 문제도 없는 듯한 도로시아가, 유독 자신의 아들인 제이미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못한 듯 보인다. 원만한 소통이 어려워 보이는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70년대의 미국이다. 그 시기 미국에서는 ‘제2물결 페미니즘’이 붐이었고, 억압된 여성의 삶은 여성들의 각성에 의해 조금씩 그 단단했던 틀이 균열을 일으키는 시기였다. 그 움직임 속에서 여성 개개인은 제각각의 삶 속에서 제2의 성장통을 겪기..
봄이 왔다 한낮에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 덕에 완연한 봄을 느낄 수 있는 요즘이다. 추위에 약하지만 더위에 강한 나는, 날이 풀리자 입맛이 돌고, 활동량도 상당히 증가했다. 집안 곳곳, 매장 곳곳을 청소하는 재미로 일상을 채우고 있다. 일하고 있는 편의점은 작고 알차다. 매장의 규모는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다. 기본적인 라면, 과자부터 냉장식품과 냉동식품, 면장갑이나 비옷 같은 잡화류와 A4용지, 지우개 같은 문구류까지. 잘 나가는 상품은 담배와 라면, 즉석식품, 건전지 정도다. 작년 여름에는 계절에 맞춰 썬크림도 들여놨지만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 아니고,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시내가 있다 보니 간편한 상품들만 나가는 편이다. 상품 발주는 아르바이트생이 직접 한다. 다만 발주 통..
내 몸으로서의 삶, 연결되는 삶, 우울한 삶, 어떤 피해자의 삶, 사랑하는 삶. 그리고 미처 다 쓰지 못한 삶들까지. 그 모든 삶을 다중적으로 살아오면서 나는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만 했다. 내가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배워가는 건 생각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생각은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만큼 나는 다가오는 생각을 맞이하는 법을 배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떨 때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의 생각들이 나를 덮쳐오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다가오지 않는 생각 때문에 내 삶이 텅 비어버린 게 아닐까 걱정도 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괴로운 건 매한가지다. 생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대로 와 주지도 생각대로 진행되지도 생각대로 끝나지도 않는다. 예전에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