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자기소개가 참 어려워졌다. 내가 누구인지를 밝힐 때 말하는 것들, 어디에 살고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같은 것들은 말하는 지금에야 그렇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기자, 패션잡화MD, 선생님, 마케터 등으로 직종을 뛰어넘어 직업을 바꿔왔다. 지금 하는 일은 또 다르고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 그 후에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직업으로 나를 설명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는 곳이나 음식 취향은 어떨까? 무엇을 말하든 한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불편했다.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 긴 시간동안은 연애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고 어느 때는 남성을 만났으며 어느 때는 여성을 만났다. 이 모습들을 ..
아름다움 에 그녀가 나왔다.몇 년 만에 출연한 바르도를 마침 누군가 알아보았다. 나무 사이로 달리고 있는 브리짓 바르도와 함께, 풀밭을 질러개가 달려갔다. 여전히 머리가 길었다.또 다른 장면에서 그녀는 테라스에 앉아 있었고늙어 보였다. (이를테면 햇볕에 그을린 얼굴.)미美의 침해는 결코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예전에 내 아버지는 사랑하던 개가목장 주인의 양을 쫓다가 물어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곧장 밖으로 나가 개를 쏘았다. 그 이유에 대해그는, 길들여졌던 개가 한 번 피맛을 알면 절대 그것을 멈추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필 譯) 이 시를 읽고 나면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되는데요. 화자는 이 질문을,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랑했던 개의 죽음과 관련지어 이야기합니다. 미美와 자유의 관계,..
는 가톨릭에 의해 동성혼이 엄격히 금지되고 중형으로 다뤄졌던 1900년대 초 스페인 수녀원에서 학생 신분으로 처음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 엘리사와 마르셀라 두 여성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다루고 있다. (실제 엘리사와 마르셀라) ‘허영은 결점이다’ 1898년 스페인, 마르셀라는 가부장적이고 통제욕인 아버지, 그 곁에서 항상 숨죽이며 지내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라코루냐에 있는 수녀원 내 미션스쿨에 입학하게 되고, 수녀원에서 지내던 엘리사와 첫 만남을 가진다. 우산을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아 비에 흠뻑 젖은 마르셀라를 엘라사가 닦아주면서 두 사람의 마음도 비에 흠뻑 젖으며 사랑이 시작된다. ‘허영은 결점이다’라는 학훈이나, 수업시간에 ‘그’(남성명사)와 ‘그녀..
끔찍한 장마가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직업적인 문제로 온갖 관절과 근육에 통증을 매달고 사는데 장마가 시작되니 급기야는 아침마다 온몸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염분과 수분 섭취를 제한하고 꼬박꼬박 스트레칭을 해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주먹을 쥘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들에 퉁퉁하게 부종이 올랐다. 그런 손을 내려 발목을 쥐면, 발목이 통상 두께보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 두꺼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붓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몸이 부어올랐을 때 몸에 힘을 제대로 줄 수 없다는 것과, 이런 식의 부어오름은 보통 열감과 통증과 무기력감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샤워를 할 때 뜨거운 물을 오래 끼얹어 혈액 순환을 돕고, 수분 섭취량을 제한하고, 붓기가 염증이 되지 않도록 꼬박꼬박 소염제를..
삵은 야생동물임에도 사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을쓸모없는 존재라 여기며 스스로를 저주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용’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은 공사를 막론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쓸모가 있을 땐 취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린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 텐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길 강요당하고 산다. 쓸모 있는 존재. ‘사용’하기 좋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요라는 생각이 들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 사회의 당연한 규칙. 규칙에 따라 우리는 나름의 쓸모가 있는 존재가 되어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구성원은 서로를 사용하며 이 사회를 굴려 나간다. 그렇기에 이 사회에서 쓸모란 존재와 같은 무게를 지닌다. 쓸모로..
3. #농구하는여자 전국농구연합회의 NABA 규칙에 문제점을 느낀다면 아마추어 대회나 동호회 정기 모임에서 로컬룰을 적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우리 팀은 선수 출신과 외국 국적의 선수가 많아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러한 규칙에 문제를 느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을 바꾸는 것은 역시 쉽지 않다. 농구 규칙 안에서 배려의 이름으로 배제와 차별로 작동하는 정상규범의 문제들에 대해 농구 경력이 긴 두 명의 선수 출신 농구인 고인물(가명, 27세), 조상(가명, 26세)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허주영(이하 허): 본인의 농구 경력을 간단하게 말씀해 주세요.고인물(이하 고):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고 숭의여중, 숭의여고에서 선수활동을 하다가 1학년 때 그만두고 성인이 된 후에 본격적으..
제-주-도—-. 하고 천천히 발음해 본다. 제주도에 아무런 연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울림에는 어딘가 팍팍한 정서를 감싸 안아 돌봐주는 향수가 있다. 나를 공격하고 아프게 하지 않는 섬, 제-주-도—-.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제주도까지 내려가서 둥지를 틀고, 책방을 열고, 도자기를 빚고, 음식을 만들고, 같은 컴필레이션 음반에 본인의 노래를 수록하는 이유는 이 향수에 있을 것이다. 삶의 내/외부를 점철한, 충만한 안전에 대한 향수. 삶은 많은 점과 굴곡이 총합된 하나의 선이다. 선은 똑바로 가려 하지만 외부의 작용 때문에 수그러들기도 하고, 스스로를 관통할 것처럼 예리하게 치솟기도 한다. 이 선은 그냥 두면 금세 나의 통제 바깥까지 뻗어나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의도적으로 완..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 딸의 결혼식이 있었다. 가족끼리 친하기도 해서 부모님이 나에게 결혼식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안 그래도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사연 많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통에 부담스러운데 같이 가자니, 전혀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결국 부모님 두 분만 다녀왔다. 그 후 가열차게 결혼하라고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일인지 시들시들했다. 아버지께 너무 가까운 사람이어서 그런지 감정이입이 많이 된 모양이었다.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닌 복합적인 감정을 주는 듯 했다. 복잡한 눈빛으로 멍하니 앉아계시던 아버지가 나에게 혼잣말 같은 대화를 거셨다. “너 어릴 적에는 뽀얗고 예뻤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냐.” 지금 못생겨졌다는 말이기에 발끈해서 ‘내가 뭐 어때서?’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
*해당 에세이는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복수를 상상해본 적 있는가? 구체적으로 특정 개인을 파괴해야겠다는 욕구를 느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나는 있었다. 오래 전 내게 스토킹과 자살 협박을 했던 한 문인, 나는 매우 오랫동안 그를 죽이고 싶었다.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운동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 나는 내가 겪은 거지같은 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뒤늦게 밀어 닥치는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가해가 진행됐던 그 시간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출근길 지하철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어둠 속을 노려보며, 나는 수도 없이 상상했다. 매일 아침 그의 집에 찾아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를 죽인다. 혹은, 과거로 돌아가 자살하겠다고 협박 전화를 받던 그때로 돌아가 온갖 통쾌한 말..
나의 왼 팔뚝에는 눈에 띄는 크기의 갈색 점이 하나 도드라지듯 나있다. 엄마도 나와 똑같은 위치에, 비슷한 크기의 갈색 점이 있다. 내 점과 엄마의 점을 번갈아서 보다 보면 내가 어느 날 아무런 근본도 없이 세상에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엄마의 몸에 잉태되어 엄마의 피와 뼈를 깎아 먹으며 자라다 느닷없이 연결을 끊고 엄마의 포궁에서부터 탈락해 엄마의 몸을 찢고 나와서야 비로소 한 명의 인간이 되었음을 소스라치도록 느끼게 된다. 말 그대로 나는 엄마의 안팎을 찢고 세상 밖에 나왔다. 엄마는 나를 세상 밖으로 뱉어 내려고 17시간 동안 진통하며 간호사들에게 수도 없이 뺨을 맞았다고 했다. 17시간 진통을 하니 아픈 것보다 기가 빠져서 자꾸 잠이 오더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때 자면 그대로 죽는..
삵에게는 거울 속에 놓고 온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어떤 일 때문에 주로 우울한 것 같아요?” 뭐 이런 질문이 있나 싶었다. 우울에도 이유가 있나? 이유가 있어서 우울한 사람들도 병원을 찾아 오는구나 싶었다. “존재요. 제 존재적 문제로 우울한 것 같아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유 없는 우울. 반복적인 자살 충동. 의사는 제법 말을 차분하게 이어가고 나의 고통을 토로하지 않는 내 모습에 약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자살 충동 이야기를 하자 바로 약을 처방해주었다. 항우울제와 항불안제, 충동조절제 등을 처방 받고 약을 먹기 시작하자 마치 안경을 낀 듯 세상이 선명해졌다. 이게 아프지 않은 나의 세상이구나. 내게 병원을 추천해 준 친구는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으면 아프지 않은 상태를 알 ..
결혼 내 남편은 요리 프로와 건물 프로, 디스커버리 채널, 수술 채널을 즐겨 본다.어젯밤 그는 우리에게 응급실에 실려 온 한 남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자는 두개골과 뇌가 단검에 관통당한 상태였다.칼은 빼낸 거야? 우리는 일제히 물었다.빼냈지. 다행히 남자는 멀쩡했는데 칼날이 정확히 두 반구 사이로 들어가 절단되진 않았지.대체 누가 그의 머리에 칼을 찔러 넣은 거야? 그의 부인이.그 여자 힘 좋네, 누군가 말했다. 다들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필 譯)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이 있는데 섬뜩하군요. 방심하고 읽다가 우리도 한방 찔린 듯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곧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위급 상황이 유머로 바뀌는 지점에는 듣고 있는 사람들의 선명한 리액션이 있습니다. 마리 하우의 시는 일상생활과..
1. 장미란도 “남자”한테는 당연히 진다. 옆 테이블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힘 센 여자=장미란도 “남자”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총 326kg의 기록을 세운 장미란은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에게 무조건 진다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남자는 무엇일까. 실체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납작한 강자와 약자의 도식을 공공장소에서 무방비 상태로 듣고 말았다. 어떻게 저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과연 ‘모든 남자한테 진다’라는 말처럼 ‘나에게도 진다’라는 말도 감히 할 수 있을까. “남자”라는 기표에 은근히 자신을 포함 시키면서 여성을 객체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주체성을 획득하는 모습은 아마 우리에게 익숙할 것이다. 이브 세..
흔히 여러 가지의 해석이 쏟아지는 작품이 잘 만든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다양한 논의를 가능케 하고 너도 나도 다르게 해석하면서 화제에 오를수록 남들 하는 건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반도의 민족에게 있어 필연적으로 이러한 이슈는 곧 ‘돈’이 되기 때문에 일종의 입소문 마케팅과 맥락이 같다고 볼 수 있겠다. 일찍이 나홍진 감독은 을 일부러 여러 갈래로 해석되어 논란이 될 수 있도록 결말을 모호하게 연출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불친절한 영화’는 흥행 요소일 수 있을까? 수많은 예술 영화들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이 불친절하지만 그 때문에 외면당하는 걸 보면 또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함량미달의 깜냥으로 한 번 유추해 보자면 당연히 재미있어야 하고 시대상을 반영하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동시..
나는 때때로 관계에 대해 바라는 것이 지나치게 많았음을 고백한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연인들에 대해 대체로 많은 것을 수용하는 좋은 연인이었고 그것을 담보 삼아 내가 받고자 하는 것을 연인에게 달라고 요구하며 관계를 맺거나, 파탄 내거나, 주도해갔다. 그런 요구에 목줄 메인 개처럼 끌려다니던 연인들은 언제나 너무 빨리 지쳐버리곤 했다. 지친 그들이 가장 손쉽게 취하는 방법은 이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해를 포기하면 나는 ‘그래, 네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 너는 그냥 개인데.’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놓아주었다. 그들은 관계의 일부분에서 그들 스스로가 그런 취급을 받은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는 나의 놓음에 쫓겨 사라졌다.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당시의 연인이던 W에게 과거 있었던 일을 아주 어렵게 털..
결혼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왜 별별 이유를 다 붙여서 결혼 안 해! 라고 외치는 것일까. 찬찬히 들여다보니 사실은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었다. 애인과 데이트를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마다 같은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지기 싫었다. 사회인이다 보니 주중에는 바빠서 주말에 겨우 만날 수 있는데 그조차 각자 약속이 있으면 만날 시간이 더 줄었다. 주중에도 볼 수 있었으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가는 곳에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보고 싶을 때만이 아닌 싸울 때도 그랬다. 전화로, 텍스트 메시지로 소통하다가 다툴 때가 있는데 바로 옆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더라면 싸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결국 결..
윤석남의 , 1995년 작. 삼십대 초반, 한창 첫 그림책 작업을 하던 나는 정오 무렵, 영화를 보러 갔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부가 견딜 수 없는 불안과 우울 속에 아이를 맡기고 혼자 호텔로 가서 약을 삼킨다. 호텔 침대 위에 누운 여자와 온 방에 차오르던 물, 그 속에 고요히 누워있던 여자의 이미지가 지금도 또렷하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맡길 아이도 없는 나였지만 그녀가 왜 그러는지 그냥 알 것 같았다. 당시 작업 중이던 그림책의 출간은 미정이었고, 밤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문득 문득 이게 허망한 짓은 아닌지 자주 의심했다. 내게 재능은 있는지, 그림이 밥벌이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도 작업을 놓지 못했다. 나는 존재 증명에 목마른 애처로운 삼십대였다. 영화는 인기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이거나 먹어라, 세상아! 영화는 이니드와 레베카가 졸업식장을 뛰어 나와 학사모를 집어 던지고 학교를 향해 쌍뻐큐를 날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니드가 졸업을 해서 아쉬워하는 건 찌질한 데니스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이니드와 레베카는 우선 돈을 모아 독립해서 같이 사는 것을 제1목표로 삼는다. 서로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둘은 졸업식을 기점으로 점차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다. 졸업식은 했지만 이니드는 학교에 남아 마지막 미술 수업을 들어야 했고, 레베카는 곧바로 까페에 취직하게 된다. 둘의 각기 다른 행보는 그들이 입는 옷에서도 드러나는데, 영화 내내 이니드는 이전과 같이 옷이나 머리를 통해 변덕스러운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사회인이 된 레베카는 중반부터 깔끔..
주변인들에게 이를 털어놓아야 할까, 털어놓는다면 누구에게 먼저 이야기해야 할까 등을 고민하며 일상을 지킨 지 한두 달여가 되어가던 어느 날, 우연히 다니던 대학 내의 상담실 홍보간행물을 보고 상담 치료를 시작할 마음을 먹었다. 당시의 나는 학교를 늦게 복학해 마저 다니느라 삶의 터전을 꾸려 놓았던 서울로부터 홀로 떨어져 먼 지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오전과 오후 시간에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오후 늦은 시간부터 새벽 늦게까지는 영상 기획이나 편집 작업을 하여 생계를 꾸리고, 주말에는 누드모델로 일하거나 앞선 화에서 말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거나 당시에 교제하던 남자친구를 만났다. 사방에 낯선 타인들만이 가득했다. 규칙적이고 피로하고 목가적인 나날의 연속에서, 어디에도 털어놓고 의논할 곳이 없..
나에게 관계다운 인간관계가 생긴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관계라기보다는 누군가와 얽혀있는 삶을 살았다. 더 이전엔 지나치게 격리된 삶을 살았는데, 격리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누군가를 내 옆에 얽어놓고 눌러 앉히려 했던 시간이 거의 10여 년쯤 된다. 동아줄처럼 붙잡고서 서로 도무지 놓아줄 줄 모르던 그때.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끊임없이 홀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욕망만 키워 가던 그때.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온 시간들. 10년을 그렇게 살다가 홀로서기를 시작하니 그제야 관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격리됐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내게 무척 힘든 일이다. 물리적 격리는 아니었고 말하자면 정신적인 격리였는데, 나 스스로 나를 가뒀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