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고양이 저기 빌어먹을 고양이가 온다. 통킨만灣으로 가는 길인지, 인종 폭동 현장으로 가는 길인지? 그것이 문제인 한편, 규율이 중심인 한편, TV에서 헬리콥터가 바다 속으로 처박히는 장면을 보았습니까? 그것이 나의 영화인 한편, 모든 난민은 용의자로 취급 받고 있습니다. 남편을 찾고 있습니까? 아들을 찾고 있습니까? 그것이 문제인 한편, 그 여자가 아이 엄마였는지, 번역가가 말한 게 저 빌어먹을 고양이인지, 인도주의로 어루만진 군기라는 전통 개념을 지키시렵니까? 그것이 문제인 한편, 한국은 전쟁에서 남은 병력을 수출합니다. 그것은 또한 나의 역사, 혹은 당신의 역사입니까? 그것이 문제인 한편, (후렴 : 라이방을 쓴 독재자 박정희와 그의 부하 군인들) 얼마예요? 750만 달러 = 1개 사단 기준..
*** 타인의 성폭행피해생존담에 트리거가 있으신 독자분들께서는 이번화 구독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7년쯤 잊고 있던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지금은 2017년 5월 29일의 아침이다. 부지불식간에, 삽시간에 쏟아지듯 기억이 회복되는 감각을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 기억은 너무나 참혹하고 믿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에,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르자마자 그 직후에 바로 그것을 부정한다. 실내 온도가 23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따뜻한 나날 중에 전기장판까지 틀어놓고도 온몸이 저릴 정도로 차가워지는 이상한 증세를 겪으며 몸을 떤다. 그날까지 처리해야 할 과업들이 있지만 도무지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다. 결국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스틸녹스 10mg을 복..
아버지는 가끔씩 내게 결혼하라는 말을 던지곤 했다. ‘아빠 퇴직 2년 남았어. 그 안에 결혼해야 축의금을 회수하지’, ‘회사 가지 말고 시집이나 가’, ‘친구가 아니라 남편을 데려와야 할 거 아니야’ 등등. 그때마다 나는 왜 아버지가 나에게 결혼을 하라고 할까 궁금해 하며 그 이유를 추측하곤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모라는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 말이다. 아버지는 회사 다니는 것이 너무도 지겹고 힘들지만 ‘너희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는 내색을 내 평생에 걸쳐 하셨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물리적인 것도 함께, 성인이 된 후에는 정서적으로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물론 그런 것들이 회사 다니기 싫다는 뜻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등학생 때는..
노년의 삶 2018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다큐는 아르헨티나, 스페인, 우루과이에 사는 노년 여성들의 삶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은퇴 후 거의 매일 오후 가까운 동네 영화관을 찾는다. 노르마는 일 년에 한 번 타 지역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갈 정도로 열성적인 씨네필이다. 사전에 일정을 꼼꼼히 확인하고 상영 시간에 맞춰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방금 본 영화를 잊지 않기 위해 영화제 카탈로그에 짧은 후기를 남기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씨네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모습이다. 그의 삶은 앞으로 만날 영화에 대한 설레임 속에 있으며 여전히 역동적이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는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사회에서도 무언갈 사랑하고 설레이는 감정은 주로 젊은 세대의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 의미..
안녕하세요, 본격적인 연재에 앞서 당신께 인사를 드립니다. 제 이름은 김경진입니다. 2019년인 올해 29세가 되었고, 여성이고, 성폭행피해생존자이며, 사무실 노동자였으며, 차별받았던 딸이고, 누드모델인, 당신의 주변에 흔히 있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한때 영화 공부를 했고 영상 제작 일을 했었지만 직업적으로 무언가 이룬 적이 없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글로써 한 번도 성취해 본 적 없는 작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인 제가 많은 분들이 애정을 담아 구성하고 있는 소중한 웹진인 쪽에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말로는 제가 잘 하지 못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큰 제목을 라고 정해 놓고 나서야 비로소 글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언젠가 글감이 되겠거니..
식구들의 대화 2019년 6월 3일, 용산 모 카페 삵 : 크게들 말해줘.최주성이 : 하, 참나.제이크 : 이 샌드위치는 저녁이야?연두 : 어, 이거 하나씩 나눠 먹으려고.제이크 : 그럼 저번에 녹취했던 거는 아예 안 들렸어?삵 : 아니, 다 들리긴 들리는데 내가 정리하기 너무 힘들어서. 그때 기운이 별로였어. 좋은 기운이 오늘은 느껴져서.최주성이 : 아~연두 : 오옹~제이크 : 그래? 주제는 있는거야?삵 : 주제 같은 건 없지.최주성이 : 언니 좀 정해와.연두, 제이크 : (웃음)삵 : 아니, 우리가 주제 따로 안 정하고 얘기하잖아.최주성이 : 막상 말할라 하면,제이크 : 근데, 아무리 기운이 좋아도,삵 : 아니, 근데 뭐 말할려고 하지마.제이크 : 아. (뭔가를 까서 먹는 소리)연두 : 아니, 나 오..
막내딸 하늘은 몇 해 동안어두웠다.내 피부는 라이스 페이퍼처럼 창백하고 축축해졌다.저 밖 들판에 서서 따가운 햇살에 바짝 말라붙기 전어머니의 피부는 어땠을까, 헤아려본다. 최근에 눈꺼풀을 만지면 마치 데일 듯이 뜨거운 무언가를 만진 것처럼내 손이 반응한다.아스피린 같은 내 하얀 피부는편두통으로 욱신거린다. 특히 두통이 불꽃처럼 치솟는저녁이면 어머니가내 왼편 얼굴을 마사지해 준다. 오늘 아침그녀의 숨소리는 자갈 구르듯 그르렁거렸고 무뚝뚝한 말투는 어딘가 다정했다.휠체어에 태워 어머니를 욕실로 데려갔을 때그녀는 기분이 좋았는지커다란 젖가슴에 대해 농담을 늘어놓았다.뿌연 물속에 떠다니는두 마리의 바다코끼리 같지 않니?축 늘어져, 주변으로 콧수염 난 젖꼭지라니.나는 젖가슴을 문질렀다, 입 안에 도는시큼한 맛을 ..
많은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는 단어가 불편하고 거슬리는 것은 소수자가 겪는 일들 중 하나일 것이다. 매끄럽게 흐르던 대화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단어들이 이 생각 저 생각을 이끌고 상대방에게 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검열하게 한다. 요즘 들어 더 생각하게 된 단어가 있는데,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줄여서 남친, 여친)’다. 성적지향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지만 여성 애인이 생기는 순간 쓸 수 없는 단어가 됐다. 이성애자만이 남자/여자친구를 연인을 뜻하는 말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이성애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남자/여자친구 대신 ‘애인’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생긴 몇 가지 일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지..
작년에 여러 예술 활동을 하면서 한 단체의 달력 작업을 했다. 7,80년대 국가폭력 피해자분들을 지원하는 단체였는데 그곳에서 70년대 노동 운동을 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 분들과 함께 예술 워크숍을 하고 그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달력으로 제작했다. 장년의 여성노동자분들을 그리면서 인물 주위로 꽃을 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꽃이 여성을 비하하는 진부한 클리세임을 모르지 않는 내가 꽃을 그리다니! 놀라웠다. 그러다가 알아차렸다. 이제야 나는 나의 과거와 조금씩 화해하고 있다는 걸. 내게 꽃은 더 이상 여성을 비하하는 상징이 아니었다. 십대의 여성노동자에서 장년의 여성노동자로 살아온 시간의 상징이었고 꽃을 피워내듯 삶을 피운 그분들을 정성을 다해 그리고 싶은 내 마음의 소박한 표현이었다..
다름이 문제 되지 않는 그들이 있다는 건삵에게는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어느 날 연두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걱정이 되어서 연두에게 만나자고 했고 연두는 날 만나주었다. 연두는 처음에는 내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나를 포함한 우리 사차원 식구들은 그냥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들 같다고 했다. 내게도 그렇다. 연두와 제이크, 최주성이 모두 만날 때는 물론 만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는 인정해야겠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존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예전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길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을..
13층 창문에 매달린 여자 그녀는 13층 창문에 매달린 여자다. 임대 아파트의 콘크리트 창틀을 꼭 붙잡고 있는 양 손은 하얗게 질려 있다. 시카고 동부의 13층 창문에 매달린 그녀의 머리 위로 새들이 빙빙 돌고 있다. 새들은 후광이 될 수도,곧 그녀를 으스러뜨릴 유리 폭풍이 될 수도 있다. 그녀는 해방될 거라고 믿는다. 13층 창문에 매달린 여자는 홑몸이 아니다. 시카고 동쪽 지역에 사는 그녀는 아이들을 둔 여성이다. 젖먹이 아기 카를로스, 마거릿, 그리고 맏이 지미가 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의 딸이며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다.그녀는 지금까지 만난 두 남편들 사이에서 부서진여러 개의 파편이다. 그녀는 이 아파트 건물의 모든 여성이다. 그들 자신을 지켜보듯 그녀를 지켜보고 서 있는 여성들이다. 어릴 때 그..
어째 잠잠하다 싶더니 또 시작이다. 이전에는 서른네 살이었던 거 같은데 이번에는 서른여섯 살이다. ‘누가 바로 사귀라고 하니, 밥만 먹고 와.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봐야 할 거 아니야.’ 드라마 대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어머니의 말에 간곡한 심정이 한 가득이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지. 지금이야 젊다지만 늙어서까지 혼자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아니? 그러니까 얼른 만나봐.’ 내 얼굴만 보면 성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내적 갈등 끝에 겨우 ‘만나는 사람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누군지 당장 데려 오라신다. 누구인지 만나보면 기절하실 텐데. 어머니의 정신건강이 걱정되므로 내가 알아서 잘 만나고 있다고 둘러댔다. 피하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굴하지 않고 재시작이다. ‘밥 한 번 먹..
Les Grappes de raisins - 포도송이 1930년 L'arbre de vie – 생명나무 1928년 성경에 나오는 를 제목으로 하는 그림 자신의 그림 앞에서 세라핀 루이 세라핀 루이, 그를 나는 영화로 알게 되었다. 시골마을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여자가 신의 계시로 그림을 그리다가 정신병원에서 죽었다는 간략한 이야기의 영화였다. 마음이 갔지만 보지는 않았다. 차마 대면하기가 두려웠다. 그 무렵 나는 마흔이었고 경력은 미천하고 미래는 막막했다. 홀로 하는 작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그림 그리는 것은 당연히 돈이 되지 않았다. 밤마다 구직 사이트의 청소나 서빙 알바를 체크하며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상상하곤 했다. 몇 차례 그림책 기획이 엎어지면서 나는 자주 불안했고 밥이 되지 못하는 그림을..
삵과 고래, 기린과 사육사에게서로의 다름은 관계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퀸치광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밴드 ‘퀸’에 빠진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였다. 그들은 퀸의 무엇에 열광했을까. 나는 그들 관계의 형태가 퀸의 음악과 그들의 팬을 만드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제각각 개성이 강함에도 누구 하나 지워지지 않는 관계.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 그런 관계의 기저에는 신뢰가 있었을 것이다. 신뢰란 어감이 주는 것만큼 따뜻하기만 한 단어는 아니다. 갈등과 고난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신뢰는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퀸의 인터뷰 중 이런 내용을 본 적 있다. 밴드가 잘 되면 결국 해체한다는 말들, 언제까지 퀸일지 두고 보자는 ..
안녕하세요, 도우리 작가입니다.기쁜 소식 알려드립니다. 그동안 이곳 에 쓰던 ‘탈연애 선언’ 연재를 종료한다는 소식입니다. 개인 작가 차원에서 다루던 ‘탈연애’ 주제를 팀 프로젝트 차원으로 확장하면서 공동 출간을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여정, 그러니까 제가 즐거워하고 부딪히고 창피해하고 그러다 더 나아가게 된 지점들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선언 중독자: 탈연애 선언 퍼포먼스의 시작 탈연애 선언 퍼포먼스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것은 1월 말의 새벽이었습니다. 이불 속에 파묻혀 를 읽던 중이었어요. 그러다 “이성애주의? 그것은 낭만적 사랑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파시즘일 수 있다”는 문장을 마주했을 때, 이불을 박찼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각이었어요. 정상 연애 의제를 더욱 적..
세계는 여기서 끝날 거예요 세계는 키친 테이블에서 시작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땅이 준 선물로 식사가 준비되고 테이블에 차려집니다. 식탁 위 풍경은, 천지창조 이래 언제나 그러했고 내일도 그럴 테니까요. 닭이나 개는 우리 식탁에서 쫓겨난답니다. 식탁 모서리에선 아기들의 이가 나기 시작하고요. 식탁 아래에선 아기들의 무릎이 긁혀가지요. 바로 이곳에서 아이들은 가르침을 들어요. 인간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말예요. 식탁 앞에 앉아 우린 남자들을 만들고 여자들을 만들어요. 이 식탁에서 우리는 수다를 떨고 적병들과 죽은 연인들의 유령을 불러냅니다. 간밤 꿈들이 우리와 함께 커피를 마셔요. 꿈은 우리 아이들에게 어깨동무를 해줍니다. 축 처진 우리의 가엾은 자아를 보고 함께 웃음을..
많은 사람들이 외모, 스타일, 사회적 지위 같은 조건들에서 로맨틱한 끌림(‘연애감정’이라는 단어는 연인이라는 계약 관계를 내포하는 느낌이라 피했다)을 느낀다고 한다. 나도 분명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긴 하겠지만 결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사랑에 빠지려면 그 사람과 내가 통하는 지점이 있어야 했다. 고유한 이야기, 그리고 내가 그 이야기에 공명하는가가 사랑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성별도 조건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의문이 들었다. 그가 여성이어서, 남성이어서 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들을 듣고 내가 끌렸다면 나는 그 사람이 여성이어서, 남성이어서 사랑한 것 아닐까? 레즈비언의 성적 지향 이야기에 많이 끌리긴 하지만 남성의 경우에도 그가 가진 독특한 사고방식, 삶의 경험 이런 것들에 매혹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별은..
작업실에서 나혜석의 모습, 1932년 추정, 개인 소장. (사진 제공=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내가 처음 접한 그림 그리는 여자는 나혜석이었다. 풍문 속의 모던 걸 나혜석은 변호사이자 외교관인 남성과 결혼했고 남편친구와 연애를 했으며 그리고 이혼했다. 그의 그림보다 세상이 수군거린 그의 사생활을 먼저 알았다. 불륜의 대명사, 정조 잃은 여자 나혜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왕지사 남편 몰래 연애할 거, 입 무겁고 괜찮은 남자랑 연애할 것이지, 찌질하게 소문이나 내고 다니는 남자랑 연애하다니, 안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혜석의 그림 역시 별 감흥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 부유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오빠의 사랑 속에 성장하고 오빠의 권유로 미술을 선택했을 뿐, 그 선택이 자신의 의지라는 언설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
저주로부터 일탈하기: 난잡한 복종 안티고네의 고백 “그래요, 고백합니다. 저는 제 행동을 부인하지 않겠어요.” 이것은 안티고네가 크레온 왕 앞에 섰을 때 했던 말이다. 그 누구도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해선 안 된다고 했던 크레온 왕의 칙령을 어기고, 안티고네는 자신의 오빠인 그를 묻어주었다. 안티고네는 그렇게 치명적인 위반 행위를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행위를 했음을 부인하는 것 또한 거부(위반)했다. 바로 그 두 번째 ‘위반’이 고백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문제적인 고백이 안티고네를 모호한 위치에 놓이게 한다. 그 고백의 언어에는 남성적 과도함이 스며 있으며, 크레온의 권위를 흡수한 흔적이 있다. 크레온으로부터 행위 주체성의 수사를 빌려와 말하고 있는 것. 즉 안티고네는 크레온..
『서루조당 파효』(교고쿠 나츠히코 著)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중고서점을 운영하는 주인과 그 주인에게 인생 책을 소개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간략히 소개할 수 있겠는데요, 범박한 설명이긴 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생 책을 소개받거나 소개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에도 주인이 있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저자와 독자의 합이 잘 맞는, 또는 만나야 할 인연 같은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것이겠죠. 조당의 주인은 바로 사람들에게 만나야 할 책을 만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세 개의 연결고리가 생성됩니다. 저자와 독자, 그리고 그 둘을 만나게 하는 조당의 주인. 책을 만난다는 것은 단지 돈을 지불하고 책 한 권을 사는 일이 아닌 듯 보입니다. 저자의 글쓰기 노고와 조당의 주인처럼 책을 이해..